《지난 시간엔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대표작 ‘사이코(Psycho·1960년)’를
살펴보았어요. 히치콕이 기존 영화문법을 뒤집어엎는 어떤 기발한 역발상을 보여줬는지 알아보면서 ‘샤워실’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는 영화
속 설정이 당시로선 관객의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평가했어요. 자, 당시 관객들은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던 금발
미녀(재닛 리)가 난데없이 나타난 살인마에게 난자를 당해 숨져가는 이 장면을 보고선 왜 경악을 금치 못했을까요?》
헛다리 짚게 만드는 ‘맥거핀’ 장치 통해 관객에게 ‘한 방’ 히치콕은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극장 밖’ 당신의 삶에도 맥거핀이 얼마나 많냐고
생각해 보세요. 샤워실이란 어떤 장소인가요? 샤워실 하면 일단 3개의 조건이 떠오릅니다. 첫째,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다. 둘째, 따스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셋째, 무장해제된 공간이다. 여러분도 저의 의견에 동의하나요? 그래요. 샤워실은 오직 나만을 위한 사적(私的)인 공간이에요. 벌거벗은 채 따스한 물에 샤워를 하면서 쌓인 긴장과 피로를 마음껏 푸는 곳이 바로 샤워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샤워실에서 정체 모를 살인마에게 살해를 당하다니요! 당시 관객들로선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요. 극히 개인적이고 안전하고 따스한 장소에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다니….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목욕탕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어요. 기존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살인은 십중팔구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에 △인적이 드문 으슥한 뒷골목에서 일어났지요. 그러니 이런 장면들에 익숙했던 당시 관객들로선 샤워실에서 일어나는 살인을 보고 엄청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아, 샤워를 하다가도 돌연 죽임을 당할 수 있다니! 죽음이란 건 샤워하는 순간에도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언제 어디서라도 죽음은 우리를 덮쳐올 수 있구나…’ 하고 말이지요. 히치콕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장해체된 시간과 공간에서 급작스럽게 발생하는 살인을 통해 관객의 허를 찔렀던 것이지요. 히치콕은 다음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죽은 고양이나 폐물들이 나뒹구는 어두운 거리에서 일어나는 살인보다 밝은 대낮에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살인이 더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내 영화에서 살인은 주로 집 안에서 이루어지지요. 간결하고도 가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부엌의 식탁이나 목욕탕에서 말이지요.”
기가 막힌 역발상이 아닐 수 없지요? 히치콕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뒤집는 방식 말고도 정말 장난스럽고도 의미심장한 또 하나의 역발상 기법을 착안해냈는데요. 바로 ‘맥거핀(Macguffin)’이라는 장치였답니다.
맥거핀이란 뭘까요? ‘관객이 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이었지만 알고 보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됨으로써 관객의 허를 찌르는 장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관객이 줄거리 전개를 따라가면서 계속적으로 헛다리를 집게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영화 사이코에서 맥거핀의 생생한 사례를 찾아볼까요? 부동산 회사의 여직원 마리온은 회사 공금 4만 달러를 훔쳐서 달아납니다. 그녀는 한 외진 모텔에 방을 얻은 뒤 4만 달러를 몰래 숨겨두지요. 하지만 그녀가 이 거금을 숨기는 장면을 모텔 방 한 구석에 난 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훔쳐보는 장면이 연출되고, 그 얼마 뒤 마리온은 샤워실에서 살해당합니다. 자, 이쯤 되면 관객들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 많은 돈을 누가 차지하는 걸까?’ ‘마리온을 살해한 범인이 돈을 훔쳐갔을까?’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궁금증을 품은 관객의 뒤통수를 영화는 사정없이 후려갈깁니다. 왜냐고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영화는 돈의 행방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지요.
관객들로선 황당무계한 상황이 아니겠어요? 줄거리를 감안할 때 가장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되던 4만 달러에 대해 영화는 ‘그게 뭐가 중요해?’ 하고 비웃기라도 하듯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리다니요. 이런 맥거핀 효과를 통해 히치콕은 또 한 번 관객과의 지능게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당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알고 보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하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히치콕의 또 다른 대표작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년)에서도 맥거핀 효과의 위력은 확인됩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손힐(캐리 그랜트)은 어느 날 정부요원 ‘조지 캐플란’으로 오인을 받아 괴한에게 납치됩니다. 살인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된 손힐은 ‘나의 결백을 입증해줄 사람은 캐플란뿐’이라는 생각으로 캐플란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캐플란이란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관객은 또 한 번 속아 넘어갑니다.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찾으려 했던 인물이 알고 보니 애당초 있지도 않은 인물이었다니 말이지요. 이렇듯 맥거핀은 관객의 관심을 무언가에 계속 쏠리게 만들면서 이야기의 긴장을 유지하다가 결국엔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데 유용한 영화적 수단이랍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히치콕이 착안한 맥거핀이 얄팍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어쩌면 맥거핀은 우리의 실제 삶과 생활 속에도 존재하고 있는지 모르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수학경시대회에서 한 문제를 더 푸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할 일대 사건’이라고 의미심장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볼 때 경시대회의 한 문제가 정말 인생을 판가름할 가치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선 이렇게 ‘진정 중요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사건이나 가치들이 비일비재하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도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내 인생의 맥거핀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갖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달라질 거예요. 인생을 현미경이나 돋보기가 아닌, 망원경으로 바라볼 줄 아는 혜안(慧眼)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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