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산 영실 ‘수행굴’ 아시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5일 07시 00분


옛 고승들 참선 장소… 제주불교 발상지 추정
벌목꾼들 다니던 길에 입구… 일본동전도 나와

한라산 영실계곡 능선의 숨겨진 유적인 수행굴을 확인했다. 동굴 내부는 20여 명이 지낼 만큼 넓었다. 스님 등 수행자나 벌목꾼 등이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임재영 기자
한라산 영실계곡 능선의 숨겨진 유적인 수행굴을 확인했다. 동굴 내부는 20여 명이 지낼 만큼 넓었다. 스님 등 수행자나 벌목꾼 등이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임재영 기자

한라산 해발 1300m 일대 영실(靈室)은 신령이 사는 골짜기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거대한 병풍바위와 ‘오백나한(五百羅漢)’으로 불리는 기암괴석은 절경이고 연중 맑은 물이 흐른다. 여기에 옛날 고승들이 참선을 하며 도를 닦던 ‘수행굴(修行窟)’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불교계에서는 제주불교의 발상지로 추정하고 있다. 3일 한라산국립공원 청원경찰 등과 함께 수행굴을 탐사했다.

영실 휴게소에서 하천을 건너 동쪽 능선. 예전 소와 말을 기르는 목동과 벌목꾼 등이 다닌 길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제주조릿대가 무성한 숲 능선을 30분 남짓 오르다 더욱 깊은 숲으로 진입했다. 수차례 헤맨 끝에 굴처럼 보이는 조그만 입구를 확인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굽히며 입구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20여 명이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내부에 두께가 10cm가량 되는 판석이 놓였고 밑으로 불을 땐 흔적이 남았다. 부처님 상을 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도 보였다. 해발 1375m에 위치한 이 동굴은 길이는 30여 m로 길지 않지만 한라산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린굴(해발 800m)보다 높은 곳에 형성됐다.

동굴 위쪽 벽면에는 검은색의 거미가 기어 다녔다. 귀뚜라미처럼 생긴 곤충도 서식했다. 굴 안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양송남 한라산국립공원 영실관리팀 단속반장(59)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일본 동전을 발견했다. 앞면에는 ‘일전(一錢)’, 뒷면에는 ‘대일본 소화 15년’으로 쓰인 글자가 뚜렷했다. 일제강점기에 사용한 동전으로 추정된다.

동굴 주변은 제주조릿대, 졸참나무, 단풍나무로 둘러싸였고 참개별꽃, 개족두리가 꽃을 피웠다. 외부 동굴 위쪽에 100년 이상 된 커다란 소나무가 강풍에 쓰러져 뿌리째 뽑혔다. 양 반장은 “수행굴 주변에 별다른 특징이 없어 동굴을 찾기가 힘들다”며 “2001년 지방 언론사의 한라산 탐사를 통해 존재가 확인됐다”고 말했다.

1601년 한라산을 오른 김상헌 어사는 ‘남사록’에 ‘수행굴을 지났다. 옛날 고승 휴량이 들어가 살던 곳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1901년 외국인으로 처음 한라산에 올라 최초로 높이 1950m를 측정한 독일인 지크프리트 겐테는 여행기에서 ‘벌목꾼들이 살고 있는 굴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했다. 수행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그동안 수행굴은 잊혀진 유적이었다. 오정훈 제주도 세계자연유산본부 총괄부장은 “수행굴은 세계자연유산인 한라산의 가치를 더욱 높여줄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며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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