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언은 양국 간에 낀 100년의 먹구름을 걷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그쳐선 안 돼요. 참여자들을 더 늘려야 합니다.”
10일 오전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발표회장인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김영호 유한대 총장(70·사진)은 시종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한국 측 의견을 일본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김 총장이 이번 공동선언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2월 19일. 도쿄의 이와나미 서점에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오다가와 고(小田川興) 아사히신문 전 편집위원 등 일본인 지인 6명과 난상토론을 벌였다. 20일까지 계속된 토론 끝에 이들은 한일강제병합과 관련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양국의 지식인들은 ‘한일 간 근본적인 화해가 이뤄져야 진정한 우호관계가 성립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일본 지식인들의 서명을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 절차와 형식에 중대한 결점이 있고, 한발 더 나아가 무효라는 표현이 들어 있어 일본인이 서명하기 어려웠던 건 사실입니다. 또 선언문에 ‘불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서명을 포기한 지식인도 몇몇 있었습니다.”
선언문 발표까지는 난항이었다. 지난해 12월 말 선언문을 쓰기 시작했지만 발표 전날인 9일 밤까지 유한대 총장실에서 일본 측 지식인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문구 수정을 거듭했다. 김 총장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일본 지식인들과 우리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 했다”며 “특히 ‘병합조약은 불법이고 무효’라는 내용을 넣고 그에 대한 근거를 일본 측에서 설명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이육사 시인의 ‘광야’의 한 구절인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를 인용하면서 앞으로 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문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병합 불의부당, 역사적 사실 양국 500명씩 1000명 서명해 8월 日정부에 조치 촉구할 것 “100년 전의 한일병합조약이 일본의 군사력에 의해 강제로 이뤄졌고 불의부당(不義不當)하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일본 국민과 정부도 이런 역사적 평가를 100% 수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일본 측에서 주도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사진) 도쿄대 명예교수는 10일 “앞으로 한일 병합조약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일본 국민과 정부에 제대로 설명해나가겠다”며 이처럼 말했다. 이날의 지식인 공동성명이 끝이 아니라 양국 간 진정한 화해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와다 교수는 공동성명의 의의에 대해 “한일병합이 강제됐다는 인식은 이미 상당수 일본 지식인 가운데 공유돼온 측면이 많지만, 오늘의 공동성명은 병합조약이 명백히 불의부당하다는 데 양국 지식인들이 합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평가했다.
기자회견에서 공동성명을 낭독한 그는 이에 앞서 가진 본보와의 통화에서 “오늘 공동성명에는 한일 양국에서 각각 100명 정도가 참여했지만, 양국 각각 500명씩 모두 1000명을 목표로 서명 작업을 계속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한일병합 100년을 맞는 8월경 일본 정부에 공동성명을 공식 제출하면서 뭔가 진전된 조치를 촉구하겠다”며 “그때쯤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정부 담화에 오늘의 공동성명이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병합 100년이라는 결정적인 의미를 정권 담당자들이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동성명 서명자가 일본 전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양식 있는 일본 지식인들이 역사적 평가에 일치된 견해를 나타내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강조했다.
10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선언문을 낭독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왼쪽)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병합조약을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은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 오른쪽으로 김진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고은 시인, 김영호 유한대 총장. 전영한 기자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한일병합조약은 불의부당하며 당초부터 무효다’라는 내용의 성명에 이름을 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유명 지식인들이 일부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나서려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공동성명에는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를 비롯해 전·현직 언론인, 시민운동가, 작가, 영화감독, 미술평론가, 종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서명했다. 일본 여론과 정부 정책 등에 나름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나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도쿄대 교수 등 일반인에게 꽤 이름이 알려진 인물도 다수 있다. 작가 김석범 씨와 강상중 도쿄대 교수 등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국인도 10여 명 눈에 띈다. 성명을 주도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서명작업을 계속해 7월까지 일본에서 500명으로부터 이름을 받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일본 측 서명자의 주축은 역사학자를 비롯한 대학교수 그룹이다. 도쿄대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대학교수가 대거 참여했다. 한국 역사나 정치를 전공한 교수가 많은 편이지만 법학, 여성사, 유럽 근대사, 미국사, 문학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꽤 이름을 올렸다. 상당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계열 출판사로 과거 한국 민주화운동을 응원했던 이와나미(巖波)서점의 출판물에 기고해 온 인물이다.
다만 한국과 달리 서명자들이 대부분 진보 측 인사로 한정됐다는 점, 젊은층의 참여가 저조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유력 언론사의 현역 언론인이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도 한국과 다른 점이다. 막판에 서명 명단에서 빠진 사람도 있었다. 양국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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