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받고 휴대전화 덜컥 개통
불법스팸 과태료 1000만원 등
서울역 노숙인들 빚 1000억 추정
서울시 예방책 마련했지만
인권위 전면 재검토에 물거품
“희망근로를 해서 한달에 85만 원 정도 벌어요. 근데 내 앞으로 밀린 세금이 6200만 원이라는데요. 예전에 모르는 사람한테 인감 좀 떼 준 것밖에 없는데 그게 뭐라더라, 사업자등록인가가 됐다고 하네요.”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는 이청수 씨(가명·52)는 2005년 도박 비용을 대신 내주겠다던 남자에게 인감과 주민등록등본을 넘겨줬다. 5년 사이 그는 사업자등록 신고를 한 ‘사장님’이 돼 있었다.
○ 화살이 돼 돌아온 명의
11일 오전 서울역 앞 광장에 작은 천막 두 개가 설치됐다. 이 씨처럼 신용 문제로 고통 받는 노숙인들을 위한 ‘찾아가는 법률상담소’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쉼터 및 쪽방촌에 거주하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신용회복 서비스를 추진해왔다. 지금까지 397명이 상담을 받고 파산신고 및 채무조정을 해 부채 230억 원을 면제받았다. 쉼터보다 환경이 더 열악한 거리 노숙인을 상대로 하는 상담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상담을 꺼리지 않을까 했던 서울시 우려와 달리 천막 밖으로까지 금세 줄이 늘어섰다.
40대 노숙인 김수희 씨(가명)는 상담에 앞서 점퍼 안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첫 장에는 ‘불법스팸 과태료 납부 안내문’이라는 문구 아래 벌금 1080만 원을 독촉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예전에 돈이 급해서 1대에 10만 원씩 받고 휴대전화 8대를 개통한 적이 있다”며 “그 사람들이 스팸업자들한테 대포폰을 판 것 같다”고 했다. ‘명의’는 거리 노숙인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자 동시에 유혹이다. 이날의 상담 사례도 ‘고시원 방 얻어 줄 테니 잠시만 빌려달라’는 ‘업자’들의 달콤한 말에 대수롭지 않게 명의를 넘긴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서울시와 노숙인 쉼터 측은 서울역 근방 노숙인들의 채무만 합쳐도 1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김찬호 씨(가명·39)도 명의를 빌려줬다 통신요금 800만 원을 빚졌다. 2006년 마지막으로 확인한 액수여서 지금은 1000만 원이 넘었을 것 같다고 했다. 유성주 씨(가명·29) 역시 본인 명의 휴대전화 5대에 밀려있는 172만 원 때문에 통장 개설도 못하고 있다.
○ 거리로 나간 신용회복 상담소
이날 상담을 진행한 강윤선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부장은 “통신요금은 카드 빚이나 대출과 달라서 채무 조정이 안 된다”며 “나이가 젊거나 채무액이 1000만 원 이하인 경우 파산 신청도 어렵기 때문에 최대한 사정을 말하고 변제액을 조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서울시는 노숙인 등 저소득 취약계층의 명의도용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이들 명의로 금융대출이나 휴대전화 개통, 사업자·차량 등록을 불가능하게 하는 대책을 시도했었다. 자활 준비를 마친 노숙인에게는 대면 상담을 거쳐 철회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 대책이 노숙인들의 인권 및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관계자는 “어느 상담센터를 가보더라도 노숙인들의 자활 의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명의도용 문제다”며 “요즘은 휴대전화 기계 값도 비싼 데다 소액결제도 가능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새 기본 1000만 원씩 빚진 사례가 많다”고 했다. 시는 이번 상담 결과를 분석해 매월 1회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 거리 노숙인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거리 상담을 정례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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