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시민군 수습위 여성대표 정현애 씨의 ‘온가족 투쟁사’
남편은 체포돼 내란죄 복역… 여동생-시누이는 구금
시동생-시누남편 시민군으로 “제대로 기억되길 바랄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여성 대표로 참여했던 정현애 씨가 남편, 시동생, 시누이(왼쪽부터)와 함께 12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았다. 정 씨는 “5·18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를 실현한 우리 모두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광주=박영철 기자
“30년 전 5월도 이렇게 푸르렀는데…. 5월 하늘만 보면 왜 이렇게 목이 멜까요.” 정현애 씨(58·여·전 광주시의원)는 5월만 되면 가슴이 먹먹하다. 핏빛으로 멍든 가슴은 3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지워지지 않은 상흔(傷痕)으로 남아 있다. 12일 오후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정 씨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저는 5·18묘지에 자주 안 와요. 왔다 가면 사나흘은 몸져누워 있어야 하니까요.” 추념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정 씨는 1980년 당시 시골 중학교 사회교사였다. 남편 김상윤 씨(63·지역문화교류재단 상임위원)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됐다가 전남대에 복학한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남편은 광주 동구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서 사회과학 책방인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녹두서점은 이들 부부의 단칸 신혼방이자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의 사랑방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계엄 확대로 광주에는 7공수여단이 투입됐다. 그날 밤 정 씨 남편을 비롯한 재야인사와 대학생 지도자들은 줄줄이 붙잡혀 보안대로 끌려갔다.
5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18일 공수부대는 3, 4명씩 한 조가 돼 금남로 주변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구타한 뒤 연행했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입은 채 군 트럭에 실려 갔다. 정 씨와 여동생 현순 씨(56)는 서점 앞에서 겁에 질린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에 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한 것이다. 당시 방직공장에 다니던 정 씨의 시동생 김상집 씨(55)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 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에 치를 떨었다”고 회고했다.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정 씨 시동생과 나중에 정 씨의 시누이 남편이 되는 엄태주 씨(54)는 시민군이 됐다. 정 씨와 여동생은 계엄 당국의 거짓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당시 상황일지를 작성하던 정 씨 등은 ‘들불야학’을 운영하던 윤상원 씨에게 일지를 건넸다. 윤 씨는 ‘투사회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시내 곳곳에 수천 부씩 뿌렸다.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정 씨는 수습대책위에 여성대표로 참여했다. 주검 수습, 전단 배포, 집회 개최 등의 일을 하면서 그는 마지막까지 도청 사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벌어졌고, 그는 녹두서점에서 시동생, 여동생과 함께 체포됐다.
정 씨와 여동생은 광산경찰서 유치장과 상무대 영창을 오가며 조사를 받았다. 그해 6월 중순에는 정 씨의 시누이 김현주 씨(52)도 끌려왔다. “상무대 영창에서 조사를 받는 남편을 봤어요. 동생 2명에 아내, 처제까지 투쟁에 나선 탓에 남편은 더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정 씨는 “거꾸로 매달려 있던 남편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회고했다.
정 씨의 시누이는 연행 3일 만에, 여동생은 구금된 지 34일 만에 석방됐다. 정 씨는 그해 9월 5일 군 검찰로부터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남편이 내란죄로 2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처벌이 가벼워진 것을 정 씨는 나중에 알았다.
남편과 시동생은 이듬해 풀려났다. 시동생은 남편보다 8개월 먼저 나왔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신군부 세력이 법의 심판을 받자 6명의 ‘5·18 가족’은 그때서야 보상을 신청했다. 정 씨의 남편 김상윤 씨는 “5·18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앞에 나설 수 없었다”며 “지금까지 5·18의 화두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다면 이제는 ‘민주, 인권, 희생’의 5·18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 씨도 “5·18의 숭고한 정신이 제대로 해석되고 기억되길 기대한다”며 5·18정신이 ‘과거’보다는 ‘미래’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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