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2면에 게재됐다. 17일자(왼쪽) 신문에는 ‘중동진출의 새방향’ 이라는 사설이 정상적으로 게재됐지만 19일자(오른쪽 실선 부분)에는 신군부의 광주 무력 진압에 항거하는 뜻에서 게재됐어야 할 사설 대신 일반기사로 채워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토요일인 1980년 5월 17일 오후 4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 “광주가 심상치 않으니 서둘러 내려가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후 9시가 조금 넘어 광주에 도착하니 계엄군의 통행금지 속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있던 시민들은 ‘동아일보’ 완장을 차고 있는 김 기자에게 그날 벌어졌던 참상을 쏟아냈다. 동아일보는 신군부의 가혹한 검열 속에서도 시민들의 울분과 항쟁의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특별취재반을 파견했다. 다른 신문이 ‘무장폭도’ ‘난동’ 등의 표현으로 광주시민을 매도할 때 동아일보는 ‘데모대’ ‘시위’ ‘소요’ 등의 단어로 신군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군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엄혹한 비상계엄령하에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2면 오른쪽 상단에 싣던 사설을 19일자부터 23일자까지 아예 게재하지 않는 방법으로 신군부의 광주 무력진압에 항거한 것이 대표적이다.
○ 다섯 시간 걸어 참상을 알리다
두 번째 특별취재반은 20일 광주에 도착했다. 김충식(가천의과대 교수), 심송무 기자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22일자 1면 머리기사로 광주의 참상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전날 1면에는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단 한 문장의 기사를 왼쪽 상단에 배치하고 ‘光州 일원 데모사태’라는 주먹만 한 크기의 비대칭적 제목을 달아 사안이 심각하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알렸다.
광주 현지의 기자들은 민간 통신망이 두절되자 광주지검에서 대검으로 연결되는 비상통신망을 이용해 기사를 육성으로 불러 전달했다. 이마저도 끊기자 김충식 기자는 다섯 시간을 걸어 장성우체국까지 가서 전화로 기사를 송고했다. 이런 노력 끝에 26일자 1, 7면에는 생필품이 바닥나고 은행과 통신이 마비된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 최초의 르포 기사가 실렸다. 외부와 단절된 광주의 참상을 보여준 기사였다.
세 번째 특별취재반은 22일 투입됐다. 김재곤(전 논설위원), 최맹호 기자(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였다. 네 번째 특별취재반은 정구종(전 동아닷컴 사장·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 배인준(동아일보 주필), 이도성 기자(전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등으로 꾸려졌다. 당시 호남 주재기자였던 김영택, 신광연, 홍건순 기자도 취재에 나섰다. 동아일보가 신군부에 빼앗기고 말았던 동아방송에서도 박종열, 최화경 기자(동아일보 사업국장)를 현장에 보내 국민에게 광주항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 사설 게재 거부로 저항
광주항쟁의 참상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19일자부터 신문의 얼굴인 사설을 게재하지 않았다. 검열 받은 사설로는 도저히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달할 길이 없다고 판단해 아예 사설을 싣지 않고 일반 기사로 채우는 ‘무(無)사설’로 신군부에 맞섰다. 조금이나마 광주항쟁의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자 24일자부터 사설은 다시 지면에 등장했다. 다시 펜을 든 논설위원들의 첫 사설 제목은 ‘유혈의 비극은 끝나야 한다’였다. 정부를 향해 ‘사태를 직시해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하며 미봉책은 금물’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사설이 나가지 않는 동안 만평인 ‘동아희평(東亞戱評)’도 게재를 멈췄다. 촌철살인의 대명사로 불렸던 네 컷짜리 만화 ‘고바우’ 역시 검열을 피할 방법이 없어 무사설과 보조를 맞춰 8일간 게재하지 않았다. 신군부의 탄압 때문에 파행적인 지면을 자주 보아온 국민과 독자들은 사라진 사설과 만평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무사설’로 대응한 것은 신군부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었다”며 “시민군이 광주에서 방송사들을 공격한 것과 달리 동아일보 기자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민주화에 기여한 동아일보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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