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서울고법 ‘특가법상 뇌물죄’ 위헌심판 제청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9일 03시 00분


“똑같은 뇌물 약속에 한쪽은 집유, 한쪽은 징역 5년… 검찰 기소 내용 따라 형량 큰 격차”

#1. 충남 보령시 김모 전 국장(60)은 2007년 4월 보령시 웅천읍 A골프장의 인허가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3억 원 상당의 골프장 지분을 받기로 확약서를 받고 100만 원을 선수금 명목으로 챙겼다. 김 전 국장은 얼마 뒤 검찰에 덜미를 잡혔고 뇌물 1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3000만 원 미만의 뇌물을 받거나 약속한 혐의가 인정되면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지는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지난해 9월 김 전 국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했다.

#2. 서울 구로구에 근무한 이모 씨(46)는 2006년 5월 개봉동의 땅 18필지의 거래허가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김모 씨로부터 3억 원의 지급보증확인서를 받고 600만 원을 먼저 받았다. 이 씨는 얼마 뒤 약정한 3억 원까지 모두 뇌물로 간주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로 기소됐다. 뇌물액수가 1억 원이 넘으면 특가법이 적용돼 법정형량은 최소 징역 10년 이상.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는 올 2월 이 씨에게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감안해 형량 하한선의 절반인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보령시의 김 전 국장과 구로구의 이 씨는 똑같이 공무원의 직무를 이용해 3억 원의 뇌물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검찰이 어떻게 기소했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재판결과는 크게 달랐다. 돈을 실제 받은 것과 약속만 한 것을 똑같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특가법 조항의 애매함 때문이다.

이 씨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김창석)는 “검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형량 격차가 커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이 씨에게 뇌물죄의 가중처벌 조항(특가법 2조 1항 1호)이 헌법상 평등의 원칙 등에 위배되는지를 판단 받아 보라고 권했다. 이 씨는 곧바로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냈고, 재판부는 14일 이를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공무원의 뇌물 수수 범죄는 검찰의 특별수사부가 주로 맡는 중요사건 유형의 하나다. 하지만 피의자의 진술 태도나 수사 편의, 정치적 논란 여부 등에 따라 검찰이 처벌 수위를 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형평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재판부는 “거칠게 만들어진 특가법 조항 때문에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뇌물을 약속 받은 사람이나 뇌물을 받지 않은 공범까지도 뇌물 수수자와 똑같이 처벌할 수 있다”며 “검찰이 편법적인 은혜를 베풀지 않는 한 법원으로서는 정당한 양형을 실현할 아무런 수단이 없다”고 밝혔다.

이 재판부는 최근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다른 공무원에게 청탁을 하는 알선수뢰죄에 대해서도 검찰의 재량권 남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려 화제가 됐다.

서울 송파세무서 과장으로 근무했던 김모 씨는 2006년 1월 지인으로부터 서울 종로구 상가 건물의 상속세 절감을 청탁 받고 3000만 원의 뒷돈을 챙겼다. 그해 6월 김 과장은 종로 세무서에 근무하는 문모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가 특가법상 알선수뢰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알선수뢰죄가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4부는 “김 과장과 문 과장이 서로 업무상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알선수뢰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알선수뢰죄보다 형량이 낮은 알선수재죄를 적용해 징역 1년 6개월로 형량을 낮췄다.

알선수뢰죄는 ‘공무원이 직위를 이용해 알선한 행위’에 적용되는 법조항. 안면이 있는 공무원 간에 오간 단순한 청탁까지 직위를 이용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두 공무원의 관계에 대한 검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취지였다. 검찰은 상고하지 않았고 이 판결은 확정됐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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