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 자리이동을 위한 제비뽑기가 한창이다. 교탁 위 작은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 1번부터 37번까지 앉을 자리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한 장씩 뽑는다. 번호표대로 자리가 정해지면 그걸로 끝일까? 아니다. 이제부터 원하는 자리로 옮겨가기 위한 학생들의 ‘은밀한 거래’가 시작된다.
이모 양(18·서울 서초구)이 뽑은 자리번호는 ‘32번’. 교실 뒷문 바로 앞자리다. 쉬는 시간 가장 먼저 매점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자리이기에 인기 있는 자리 중 하나다.
이 양은 “주말에 시내에 나가 원하는 액세서리를 사주겠다”고 제안한 친구와 자신의 자리를 바꾸기로 했다. 그 친구가 뽑은 번호는 17번으로 1분단 세 번째 줄 첫 번째 자리. 선생님의 눈길이 자주 가는 자리인지라 ‘기피 1호’ 자리다.
이 양이 겨우 액세서리 하나에 ‘명당’을 내어주고 최악의 자리로 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고 엄청 충격을 받았거든요. 반에서 5등 안엔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10등 밖으로 밀려났어요. 앞자리는 선생님과 가까워 수업시간에 딴 짓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앉아 있어 공부하는 데 도움도 받고 자극도 되거든요. 제가 바꾼 자리 바로 옆 자리가 반 1등 친구 자리더라고요.”(이 양)
‘열공’(‘열심히 공부한다’는 뜻의 신조어)에 대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앞자리를 선호하는 학생도 적잖다. 수행평가나 조별과제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앞자리에 앉기도 한다. 자리 순서대로 조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아 앞자리에 앉으면 공부 잘하는 친구와 같은 조에 편성되기 쉽다.
일부 학생은 자신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앞자리로 가려 한다. 중학교 3학년 김모 양(15·서울 서대문구)이 그런 경우. 평소 파마와 화장으로 선생님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온 김 양은 ‘외모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완벽한 여학생’의 이미지로 변신하기 위해 앞자리로 가기로 했다. 평소 완벽한 ‘사각지대’인 1분단 맨 뒷줄 창가에 앉았던 김 양은 2분단 맨 앞자리 친구와 자리를 바꿨다. 김 양의 설명.
“선생님들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꼭 2분단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지난 시간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니?’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또 학급 컴퓨터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어서 수업준비 보조를 도맡아 하고요. 자연히 선생님들과 가까워질 수 있죠.”
토론수업처럼 특성화된 수업 때는 ‘앞자리는 공부 잘하는 학생’ ‘뒷자리는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이란 단순분류법이 통용되지 않기도 한다.
평소 에어컨에 가까워 시원한 맨 뒷자리를 고집하는 중학교 2학년 이모 군(14·서울 은평구). 이 군은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하는 영어말하기 수업 전 재빠르게 맨 앞자리로 이동한다. 평소 반에서 15등 안팎인 그가 영어엔 유독 자신이 있어서일까? 그럴 리가 없다.
“영어시험에서 한 번도 80점을 넘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저한테 영어말하기 수업은 정말 피하고 싶은 수업이죠. 맨 앞자리에 앉는 이유는 원어민 선생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책상을 ‘ㄷ’ 형태로 재배치하고 그 가운데서 수업을 진행하거든요. 그러면 앞자리가 사각지대가 돼서 저한테 영어로 말을 걸 확률이 낮아져요.”(이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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