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15개국 813개팀 참가 5개 과제 놓고 5일간 겨뤄
즐기면서 배우는 ‘파티 경연’… 한국 중학생팀 2위 입상
과제유형 3, 디비전 Ⅱ에서 2위를 차지한 ‘아라미나티’가 수상식을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한국 학생이 참여한 대회에서 중학생이 수상한 것은 처음이다. 사진 제공 한국창의력교육협회
“창의력은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상상력을 직접 실행으로 옮겨보고 실패하면 또 다른 상상력을 동원하는 시행착오 과정에서 창의력은 싹튼다.”
세계창의력올림피아드(Odyssey of the Mind·OM)의 창시자 새뮤얼 미클러스 미국 로언대 교수(75·산업디자인)는 ‘창의력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미클러스 교수는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계속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강조했다. 미클러스 교수는 미국에서 ‘창의력 교육의 아버지’로 불린다. 현재 미국 학교 4000여 곳에서 미클러스 교수의 창의력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26∼30일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열린 ‘2010 OM 세계 결승전’을 찾았다. 올해로 31번째를 맞는 이번 대회에는 한국의 23개 팀 217명을 비롯해 아시아·유럽·북중미 15개국에서 813개 팀 5500여 명이 참가했다.
○ 창의력=성실한 준비+감각적 순발력
미클러스 교수의 말처럼 OM은 과학적 창의력뿐 아니라 인문학적 감수성, 언어적 상상력, 예술적 기획력 등을 평가해 수상자를 결정한다.
OM을 주관하는 세계창의력협회는 대회 1년 전 5가지 ‘장기 도전 과제’(250점)를 발표한다. 학생들은 심사위원 앞에서 뮤지컬, 코미디 등 연극적 요소를 포함해 발표해야 한다. 팀원은 7명이고 지도교사는 학생의 건강과 시간만 관리할 뿐 과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는 없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로 꾸민 이기백 군, 김도원 양(이상 서울 숭의초 5학년)이 멕시코 대표팀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 군의 어머니인 탤런트 견미리 씨는 “또래 자녀가 있는 주변 연예인들이 관심이 컸는데 적극 추천해야겠다”고 말했다. 이스트랜싱=황규인 기자미클러스 교수는 “주제를 정해두고 창의력을 평가한다는 데 반감을 두는 이들이 있다. 창의력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오해”라며 “OM은 결과적으로 찾아낸 정답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과정을 본다”고 설명했다.
장기 도전 과제가 끝났다고 평가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문제를 주고 순발력을 알아보는 ‘자발성 과제’(100점)가 기다린다. 즉흥 과제 때는 팀원 2명은 과제에 참여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팀워크도 평가 대상이다.
하지만 평가는 평가일 뿐이다. 미국 학생들은 ‘이미 우리는 주(州) 챔피언이다’면서 대회 참가 자체를 즐겼다.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싱가포르 등 해외 각국에서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여행은 덤’이라는 분위기였다.
심사위원 그레그 슈위어스 씨는 “OM은 천재나 영재를 위한 대회가 아니다. 누구나 이 대회에 참여해 자기 창의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며 “이런 게 창의적인 거니까 보고 배우라는 대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그때그때 창의적일 수 있는지 즐기면서 배우는 축제”라고 설명했다.
○ 문화-언어장벽 깬 축제
세계 각국에서 온 팀들은 서로 짝을 이뤄 ‘버디 팀(Buddy Team)’을 맺는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온 멀린다 스티븐슨 양(15)은 “언어가 서로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함께 참여해 문제를 풀고 모든 것을 같이 나누는 게 아주 재미있다”고 말했다. 미시간주립대 근처에서 온 14개 팀은 아예 자기 집에서 홈스테이를 제공했다.
핀 트레이드도 이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 각 팀은 자기 지역의 문화를 대변하는 작은 배지(핀·pin)를 마련해 온다. 한국은 부채 모양으로 세 종류를 마련했다. 켄터키에서 온 빌 에버릿 군(12)은 “한국 핀은 색깔도 예쁘지만 아래에 달린 매듭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자기 핀을 가지고 다른 팀 핀과 교환을 한다. 가치가 높은 핀은 다른 핀 여러 개와 바꿀 수도 있다. 박성용 군(9·서울 상명초 3년)은 “하루 만에 90개를 바꿨다”며 다양한 핀을 꽂은 수건을 들어 보였다.
미국 팀은 학부모들도 대부분 함께 참석했다. 볼 씨 가족은 12년 전 아들 앨런 씨가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부모님도 줄곧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앨런 볼 씨(31)는 “고교 때 이 대회에 참여하면서 큰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는 어린 친구들이 계속 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사위원 짐 코테스 씨도 “11년 동안 이 대회에 참여하면서 학생들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무엇보다 흥미롭다”며 “수학이나 과학에 아무 관심이 없던 학생들도 이 대회 참여를 계기로 엔지니어의 길을 걷기도 한다”고 전했다.
○ 학원은 못하는 공교육의 힘
서울 계성초(사립)는 대회 참여자를 모집하면서 학부모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통신문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조건은 “대회 준비기간에 학원 수업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나머지는 영어를 겁내지 않을 것, 수학·과학 또는 창의력에 관심이 있을 것이었다.
이 학교 이호근 교감은 “매일 오후 8, 9시까지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자기들끼리 시나리오를 쓰고 조금씩 대본을 업그레이드하면서 대회를 준비했다”며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 사물을 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1세기 학교 교육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본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회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인 지도교사들도 대부분 같은 반응이었다. ‘학원에서 이 대회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교사는 “학생 7명이 교실 두 칸을 쓴다. 학원에서는 단위 면적당 이득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교사도 “수상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데 학부모들이 비싼 수강료를 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받았다.
한편 한국 팀 중에서는 송지윤 이대현(이상 김해 관동중 2년) 구예모(김해여중 2년) 박예은 서정현 이경민 학생(김해 가야중 1년) 등으로 구성된 아라미나티가 과제유형 3, 디비전 2에서 2위를 차지했다. 팀 지도는 김해 동광초 조철민 교사가 맡았다.
○ “공부 때문에 참가 꺼려” 인식 아쉬움
대회 참가자들은 비행기 삯을 포함해 1인당 400만 원 안팎을 부담했다. 시도교육청 지원은 전혀 없다. 한 교사는 “예산 지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공문이나 제대로 전달해 줬으면 좋겠다”며 “정부에서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지원은 하나도 없다. 이 대회에 참가하려고 연가를 냈다”고 말했다.
대회 참여가 부담스러운 건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김건호 군(16·제주외고 1년)은 “한국에 돌아가면 이틀 후에 수학 수행평가를 본다. 그리고 곧바로 기말고사”라며 “여기 와 있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있으리란 불안감이 든다”고 말했다. 학업 성적을 중시하는 일본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일본은 3팀 20여 명만 출전했다. 일본 팀 관계자는 “우리는 도요타의 지원을 받고 있어 예산 활용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참여하려는 학생이 적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미클러스 교수는 “미국에서도 학교가 변하는 속도는 교회보다도 느리다. 한국과 일본 학교는 사정이 더욱 안 좋다고 들었다”며 “개인 간, 학교 간 서열화로 끝나는 경쟁은 이제 의미가 없다. 서로 돕는 교육을 강조해야 모두가 창의적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스트랜싱=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세계창의력올림피아드(Odyssey of the Mind):
5개 장기 도전 과제별로 예선을 거쳐 국가 대표(미국은 주 대표)를 선발한다. 과제별로 비용과 시간제한이 있으며 참가자 나이에 따라 4개 부문(Ⅰ∼Ⅳ)으로 나뉜다.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하며 결승전은 미국 메릴랜드대, 아이오와주립대, 미시간주립대에서 돌아가며 열린다. (사)한국창의력교육협회에서 매년 12월 국내 예선 참가 신청을 받는다. 055-338-8009, www.odysseyofthemi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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