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정년퇴임 앞둔 ‘국내 첫 장애인 보건소장’ 김세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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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6일 03시 00분


“나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나는 의사입니다
그런 날 믿고 마음 열어준
환자 위해 제2의 삶을 삽니다”

“불편한 몸으로 일하겠나 병원에서 퇴짜 맞기 일쑤
힘없고 어려운 환자들에겐 말 들어주는것도 좋은 처방”

15일 광주 북구 중흥동 북구보건소. 말과 행동이 어눌한 중년 남성이 노인들과 포옹을 하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03년부터 북구 주민 46만여 명의 공중보건을 책임지고 있는 김세현 보건소장(59·뇌성마비 3급·사진)이다. 국내 첫 장애인 보건소장인 그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이달 말 공로연수에 들어간다. 그는 29년 동안 근무하던 보건소를 떠나 새로운 의사의 길을 찾게 된다.

김 소장은 1971년 전남대 의대에 입학한 뒤 휴학과 복학을 거듭해 10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종합병원 인턴과정에 지원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병원마다 지원자가 모자라도 “불편한 몸으로 힘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1981년 어렵게 광주 동구보건소에서 진료를 시작해 1년 뒤 북구보건소로 자리를 옮겼다.

보건소에서 2, 3년만 일하다 병원 개업을 하려 했던 김 소장이 저소득층을 주로 상대하는 보건소 의사로 눌러 앉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가 진료하던 한 할머니에게 뛰어난 의사가 있는 다른 병원을 소개해줬다. 이 할머니는 며칠 뒤 찾아와 “병원 간호사가 약 봉지를 휙 던지며 ‘다시 오지 마세요’라고 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병원들은 치료비를 제대로 받기 어려운 저소득층을 기피했다.

김 소장은 이들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틈만 나면 대학병원에서 생활하며 8년 만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땄다. 그는 노인들에게 약을 주기보다 운동이나 음식을 고려한 처방을 해 인기를 얻었다. 하루 20∼30명에 불과하던 환자가 200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은 화병을 많이 앓지만 잘 드러내지 않는다”며 “오랫동안 말을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유일한 처방”이라고 진료 노하우를 소개했다.

처방전을 하도 많이 써 팔목이 부은 적도 있었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다.

에피소드도 많다. 제약회사 직원들의 회유와 청탁도 많았지만 버텨냈다. 약값 리베이트 근절을 위한 그의 노력이 다른 보건소에도 알려져 “광주 북구보건소에서 쓰는 약은 믿을 수 있다”는 말도 돌았다. 김 소장은 “장애가 있는 나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열어 준 환자들이 오히려 고맙다”며 “아픈 몸을 추스른 뒤 환자들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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