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SCHOOL DIARY] “여자 선생님까지 ‘오∼필승’ 들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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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2일 03시 00분


17일 서울의 한 남자 고등학교 3학년 교실. 4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모 군(17·서울 은평구)은 책상위에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졸음은 이내 다른 학생들에게 전파됐다. 결국 한 반이 34명인 교실에 깨어 있는 학생은 단 3명뿐이었다. 오전 내내 공부에 열중한 탓에 피곤해서일까?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밤잠을 설쳐가며 월드컵 경기를 봤던 것. 이 군은 “불과 2주전까지만 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에 반 전체가 ‘열공’(열심히 공부하다의 줄임말)하느라 교실 분위기가 냉랭했을 정도였다”면서 “하지만 월드컵이 시작한 이후엔 쉬는 시간뿐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엎드려 자는 학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이 11일 개막하면서 학생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있다. 일부 학생은 한국대표팀 경기뿐 아니라 다른 주요 경기까지 밤새워 챙겨보는 탓에 다음 날 ‘월드컵 후유증’을 겪기도 한다.

반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월드컵을 즐기느라 분주한 학생들도 있다. 쉬는 시간마다 디지털미디어방송(DMB)을 이용해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며 친구들과 월드컵에 대한 수다를 떠는 모습이 대표적. 점심시간을 이용해 학생들끼리 자체적으로 ‘월드컵 기념 반 대항 축구대회’를 열어 학급 전체가 축구에 열광하기도 한다.

월드컵 경기 결과를 알아맞히는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내기도 벌어진다. 대부분이 ‘축구 마니아’임을 자칭하는 남학생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보여주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축구잡지를 보며 각 팀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등 치밀하게 내기에 임한다.

교사들도 월드컵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수학, 과학 수업 때는 학생들에게 ‘고지대에서 공이 작은 힘에도 멀리 나가는 이유’ ‘한국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할 확률’ 등 월드컵과 관련된 수학, 과학 이론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일부 교사는 수업시간 중 ‘짬’을 내 학생들과 ‘한국 공격수들의 문제점’ ‘한국이 강팀을 이기기 위한 전술’ 등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고1 정모 군(16·서울 강남구)은 “남자 선생님뿐 아니라 여자 선생님도 월드컵 때문에 들떠있다”며 “그리스 전이 끝난 후 한 여자 수학 선생님이 수업시간 중 잠깐 축구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평소 매우 차분한 선생님으로 유명한데 선수 개개인의 특징은 물론 남아공의 날씨까지 분석하며 다음 경기 승패를 예측하시는 열성적인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월드컵 때문에 들뜬 분위기이다 보니 아예 학교 전체가 월드컵이란 ‘축제’를 즐기기도 한다. 김남일 김정우 조용형 등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다수 배출한 인천 부평고는 한국 대 그리스 전이 있었던 12일과 아르헨티나 전이 있었던 17일 1, 2학년과 교사들이 함께 인천 부평구 신트리공원에서 ‘합동응원전’을 펼쳤다. 수능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고3은 야외로 나가는 대신 교실에서 TV를 통해 경기를 봤다. 합동응원전에 참가한 학생과 교사는 약 1000명. 이뿐만 아니라 동문회 선배들과 학부모까지 응원전에 가세했다.

이 학교 이광희 교장은 “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몰래 월드컵을 보는 것보다 스트레스도 풀면서 함께 응원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말고사를 2주가량 앞둔 학생들에게 합동응원전은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다음은 인천 부평고 학생회장 김승환 군(17·인천 부평구)의 설명.

“응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시험공부를 하는데 평소보다 오히려 집중이 더 잘되더라고요. 선생님들과 함께 응원을 하면서 평상시 근엄하기만 하던 모습과는 달리 학생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진면목’도 볼 수 있었고요. 응원을 마치고 동문회 선배들과 함께 쓰레기를 치우는 등 공부 외에 다른 것도 많이 배웠어요.”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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