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지역 치안담당 학도대, 1·4후퇴 때 섬으로 집결
적진 기습-후방교란 임무 “적 지뢰 캐내 던지기도”
“한국군은 우리가 (정규군이 아니어서) 무엇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미군 소속이었던 유격대원들은 버려진 사람이었죠. 우리가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잘 몰라서 무모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 때 서해 백령도와 교동도 등지에서 유격대를 이끌며 서해안의 북한군과 중공군을 괴롭혔던 박상준 씨(83)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회고했다. 박 씨는 1952년 3월 2일부터 1954년까지 미국 극동사령부 산하 동키사령부의 유격부대 타이거여단장을 지냈다.
박 씨는 1991년 전쟁기념관에 여단 편성 계획 상황도와 간부급 직위표, 전사자 및 실종자 명부 등을 기증했다. 박 씨는 휴전 이후 육군 제8250부대 제2연대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고 1955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기업체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했다.
6·25전쟁 당시 활동했던 유격부대는 전국적으로 30여 개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유격부대는 1·4후퇴 전까지 북한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던 학도대 치안대 청년대 등이 중공군을 피해 섬으로 후퇴해 조직했다.
“1·4후퇴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동절기만 피해 서해안 섬으로 나가 있어라.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며 섬으로 후퇴하도록 했죠. 평안북도에서 황해도까지 서해 섬으로 몰려든 치안대 학도대 등이 유격대를 조직했고, 황해도 섬에 흩어져 있던 유격부대를 통합한 것이 타이거여단이었습니다.”
유격대원들은 낮에는 훈련을 하다가 밤이 되면 적지로 침투해 △북한군과 중공군의 진지 습격 △지하조직 구축 △추락한 조종사 구출 △무기 노획 등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또 항공정찰만으로는 적의 군사시설이나 군대 이동상황 등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 유격부대가 침투해 관련 정보를 빼내오기도 했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유격부대였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었다. 피복 지급이 제대로 안 돼 대원들은 국군 전투복이나 인민군복, 민간복장 등을 제각각 구해 입었다. 무기도 형편없었다. 국군이나 경찰이 남기고 갔거나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따발총, 소련제 소총 등으로 무장했다.
“유격대가 처음 조직됐을 때 부대원의 10분의 1만 노획 무기로 무장을 했죠. 나머지 절반은 수류탄 하나씩만 갖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아예 비무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지 않는 무기인 ‘무성무기’를 개발했죠. 당수와 태권도를 가르쳤고 칼 쓰는 법을 교육했습니다. 특히 피아노선을 이용해 적의 숨을 끊는 기술도 가르쳤습니다.”
박 씨는 “적이 해안에 깔아 놓은 지뢰를 캐내 이 지뢰를 적의 보급창고에 던지며 싸웠다”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전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격대원들은 양말도 신발도 없었다.
유격부대의 활동 영역은 서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부산 영도에는 영도유격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으로 1950년 10월 CIA가 북한 내륙 깊숙이 침투해 후방을 교란할 요원을 모집하면서 창설됐다.
하지만 ‘Y부대’라고 불렀을 뿐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어디 소속인지 몰랐다. 대원들은 강원도, 함경북도까지 공중과 해상으로 침투해 적진을 교란시켰고 주로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해 ‘동해지구 반공의병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11월까지 부대원은 모두 992명이었다.
영도유격부대 대원들에겐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단지 자기들끼리 알아 볼 수 있도록 머플러를 착용했을 뿐이다. 전쟁기념관 등에는 영도유격부대 대원들이 사용했던 머플러와 함께 영도유격부대 배치 상황도, 부대 일지 등이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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