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부르세요” 서울 강남구에서 60세 이상 장년 11명을 대상으로 남성실버합창단을 만들었다. 오디션을 보고 뽑힌 11명의 단원들은 13일 오후 3시 반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논골사회복지관 6층에서 첫 연습을 가졌다. 이들은 “퇴직 후 무기력한 삶을 살면서 우울증에 빠졌는데 노래를 부르며 희망을 찾겠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강남구청
한평생 교직에 있다 몇 년 전 퇴직했다. 학생들에게 존경 받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어린 시절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안정된 직업을 가지라며 선생님을 하라고 했다. 정해진 인생,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떠난 후 우울증이 찾아왔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뭘까?” 수없이 자문했지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선망 받는 선생님, 믿음직한 아빠… 정작 ‘나’는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인생을 찾고 싶었다. 붓글씨, 헬스… 그러다 찾은 것이 ‘노래’였다.
13일 오후 3시 반 전직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박성춘 씨(66)는 그렇게 쫓기듯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논골사회복지관 6층 강당에 나타났다. 박 씨가 쥔 악보는 가곡 ‘산촌’. 콩나물 같은 것들이 오선지 위에 현란하게 그려져 있었다. 눈도 침침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방 웃었다. 이곳은 강남구청에서 만든 ‘남성실버합창단’의 첫 연습 현장. 60세 이상의 장년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은 서울시 자치구 전체에서도 처음이다. 이들 모두 생애 처음으로 ‘자아’를 찾겠다고 나섰다.
○ 퇴직, 방황, 그리고 노래
강남구가 남성실버합창단을 계획한 것은 올해 초부터. 사회에서 은퇴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장년들을 위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강남구 노인복지과 장명필 팀장은 “장년뿐 아니라 젊은층에도 ‘노년=인생 마감’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를 비롯한 11명의 단원들은 지난주 오디션을 거쳐 선발됐다.
이들은 교장선생님부터 공기업 간부, 은행 지점장,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전직도 다양했다. 희끗한 머리, 깊게 파인 얼굴 주름. “노래 한 곡이라도 제대로 할까” 하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러나 “발성부터 해봅시다”라는 지휘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 에 이 오 우”를 외쳤다.
이날 모인 11명 중 대부분은 악보조차 낯선 음악 초보들이었다. 수협중앙회 광주 금남로 지점장을 하다 퇴직한 김용 씨(68)는 “우리 세대에겐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직장 생활 중 회식 자리에서 간간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일은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 “딴따라”라는 비판을 받을까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한평생 끼를 억누르며 살아온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나도록 용기를 준 것은 친구들이었다. “남은 인생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는 조언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 장년들의 ‘자아’ 찾기
이날 강당에는 11명의 단원 외에도 다른 장년 2명이 찾아왔다. “단원 모집 포스터를 늦게 봤다”며 오디션을 보러 온 것. 예정에 없었지만 이들의 열정에 감명 받은 지휘자는 2시간 연습 후 ‘특별 오디션’을 열었다. 단원들도 “같이 늙어가자”며 이들을 반겼다.
첫날부터 이들에게 목표가 생겼다. 10월 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야외무대에서 첫 공연을 갖는다. 석 달 남짓 남은 상황. 그러나 어느 누구도 두렵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20년간 안경점 대표였던 이주삼 씨(67)는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쁘다”는 말을 했다. 1970, 80년대 개발 위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버리고 일에만 매달렸다는 그는 퇴직 후 ‘죽기 전 꼭 해야 할 것 110개’를 만들었다. 그중 음악은 ‘베스트 10’ 중 하나였다. 테너가 뭔지 바리톤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악보 볼 줄도 모른다며 선생님에게 혼나는 자체가 기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당당한 요즘 젊은 세대가 부럽다고 했다. 단원들은 “난 요즘 젊은이들이 밉다”며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렇게 ‘오픈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는 게 바로 음악의 힘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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