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인생 2막… 음악이 날 다시 세웠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5일 03시 00분


서울 강남구청 ‘남성실버합창단’ 자치구 첫 창단

60세이상 퇴직자 11명 구성
교장-CEO 등 전직 다양

“눌러왔던 끼 맘껏 펼칠 것”
10월 첫 공연 대비 맹연습

“이렇게 부르세요”  서울 강남구에서 60세 이상 장년 11명을 대상으로 남성실버합창단을 만들었다. 오디션을 보고 뽑힌 11명의 단원들은 13일 오후 3시 반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논골사회복지관 6층에서 첫 연습을 가졌다. 이들은 “퇴직 후 무기력한 삶을 살면서 우울증에 빠졌는데 노래를 부르며 희망을 찾겠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강남구청
“이렇게 부르세요” 서울 강남구에서 60세 이상 장년 11명을 대상으로 남성실버합창단을 만들었다. 오디션을 보고 뽑힌 11명의 단원들은 13일 오후 3시 반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논골사회복지관 6층에서 첫 연습을 가졌다. 이들은 “퇴직 후 무기력한 삶을 살면서 우울증에 빠졌는데 노래를 부르며 희망을 찾겠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강남구청
한평생 교직에 있다 몇 년 전 퇴직했다. 학생들에게 존경 받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어린 시절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안정된 직업을 가지라며 선생님을 하라고 했다. 정해진 인생,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떠난 후 우울증이 찾아왔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뭘까?” 수없이 자문했지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선망 받는 선생님, 믿음직한 아빠… 정작 ‘나’는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인생을 찾고 싶었다. 붓글씨, 헬스… 그러다 찾은 것이 ‘노래’였다.

13일 오후 3시 반 전직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박성춘 씨(66)는 그렇게 쫓기듯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논골사회복지관 6층 강당에 나타났다. 박 씨가 쥔 악보는 가곡 ‘산촌’. 콩나물 같은 것들이 오선지 위에 현란하게 그려져 있었다. 눈도 침침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방 웃었다. 이곳은 강남구청에서 만든 ‘남성실버합창단’의 첫 연습 현장. 60세 이상의 장년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은 서울시 자치구 전체에서도 처음이다. 이들 모두 생애 처음으로 ‘자아’를 찾겠다고 나섰다.

○ 퇴직, 방황, 그리고 노래

강남구가 남성실버합창단을 계획한 것은 올해 초부터. 사회에서 은퇴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장년들을 위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강남구 노인복지과 장명필 팀장은 “장년뿐 아니라 젊은층에도 ‘노년=인생 마감’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를 비롯한 11명의 단원들은 지난주 오디션을 거쳐 선발됐다.

이들은 교장선생님부터 공기업 간부, 은행 지점장,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전직도 다양했다. 희끗한 머리, 깊게 파인 얼굴 주름. “노래 한 곡이라도 제대로 할까” 하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러나 “발성부터 해봅시다”라는 지휘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 에 이 오 우”를 외쳤다.

이날 모인 11명 중 대부분은 악보조차 낯선 음악 초보들이었다. 수협중앙회 광주 금남로 지점장을 하다 퇴직한 김용 씨(68)는 “우리 세대에겐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직장 생활 중 회식 자리에서 간간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일은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 “딴따라”라는 비판을 받을까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한평생 끼를 억누르며 살아온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나도록 용기를 준 것은 친구들이었다. “남은 인생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는 조언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 장년들의 ‘자아’ 찾기

이날 강당에는 11명의 단원 외에도 다른 장년 2명이 찾아왔다. “단원 모집 포스터를 늦게 봤다”며 오디션을 보러 온 것. 예정에 없었지만 이들의 열정에 감명 받은 지휘자는 2시간 연습 후 ‘특별 오디션’을 열었다. 단원들도 “같이 늙어가자”며 이들을 반겼다.

첫날부터 이들에게 목표가 생겼다. 10월 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야외무대에서 첫 공연을 갖는다. 석 달 남짓 남은 상황. 그러나 어느 누구도 두렵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20년간 안경점 대표였던 이주삼 씨(67)는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쁘다”는 말을 했다. 1970, 80년대 개발 위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버리고 일에만 매달렸다는 그는 퇴직 후 ‘죽기 전 꼭 해야 할 것 110개’를 만들었다. 그중 음악은 ‘베스트 10’ 중 하나였다. 테너가 뭔지 바리톤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악보 볼 줄도 모른다며 선생님에게 혼나는 자체가 기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당당한 요즘 젊은 세대가 부럽다고 했다. 단원들은 “난 요즘 젊은이들이 밉다”며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렇게 ‘오픈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는 게 바로 음악의 힘이 아닐까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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