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헤아릴 수 없는 전쟁 유가족을 낳고 남북한 경제기반을 붕괴시켰으며 동족 간 극한 대치를 초래한 민족사의 일대 비극이었다. 동아일보도 숱한 간부와 사원이 사망되거나 납북되는 등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기간 중 다섯 차례나 사옥을 옮기면서 동아일보는 올바른 정보를 국민에게 전달하기 위해 후방에서 힘겨운 싸움을 펼쳤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비상연락을 받은 사원들이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에 모여들었다. 기자 10여 명이 경무대와 중앙청, 국방부, 주한 외국공관 등을 취재한 결과 전세가 위급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정부 발표를 토대로 제작한 26일자 동아일보는 ‘괴뢰군 돌연 남침을 기도’ ‘정예 국군 적을 요격 중’ 등의 제목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악화되는 전황은 38선에서 멀지 않은 서울에도 시시각각 전해졌다. 27일 아침에는 외국 공관들을 취재하던 정인영 기자(훗날 한라그룹 회장·2006년 작고)가 ‘외국 기관들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모아놓고 ‘일단 해산하자’고 말한 뒤 신문사가 갖고 있던 은행 예금을 모두 찾아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
27일 오후 4시경 기자들이 편집국에 모였다. “이제는 취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인쇄 담당 직원들은 흩어진 상태였다. 정인영 기자가 일본 유학 시절 식자공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문선 작업을 끝냈다. 수동 인쇄기로 호외 300부를 찍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란 제목이었다. 기자들은 이 호외를 서울시경에서 빌린 지프로 서울 시내 일원에 직접 배포했다. 서울에서 다른 어느 신문보다도 나중에 배포된, 최후의 호외였다. 호외를 낸 뒤 장인갑 편집국장, 이언진 공무국장과 10여 명의 기자 등 사원들은 무교동 ‘실비옥’으로 가서 숨돌릴 틈도 없이 이별의 술잔을 나눈 뒤 헤어졌다.
공산군의 남침 3개월여 만인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다. 사원들이 다시 모이자 동아일보는 10월 4일 신문을 속간했다. 2면에는 가슴 아픈 사고(社告)가 실렸다.
“다음 본사 사원의 행방이 불명인바 가족 되시는 분은 즉시 본사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인갑(편집국장) 정균철(영업국장) 이동욱(조사부장) 백운선(사진부장) 김성열 서정국 조용근 변영권 김준섭 편집국기자….”
장 편집국장은 인민군 치하인 8월 6일 오전 2시 자택에서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인 백운선 사진부장도 7월 10일 내무서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고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고영환 논설위원, 정균철 영업국장, 등도 연행된 뒤 소식이 끊어졌다. 뒤늦게 들려온 기쁜 소식도 있었다. 이동욱 조사부장은 평안북도 개천까지, 변영권 기자는 함경남도 홍원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 돌아왔다. 훗날 동아일보 회장을 지낸 이동욱 부장은 “개천에서 피부병에 걸려 방공호에서 격리돼 지냈다. 9월 하순 어느 날, 미군 폭격기의 굉음이 쏟아지자 인민군이 북쪽으로 달아났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는데 그 끔찍한 피부병이 나도 모르게 나았다”고 회상했다.
수복과 함께 돌아온 서울 세종로 사옥은 공산군이 인쇄시설을 파괴한 상태였다. 전시의 자금난과 용지난이 겹쳐 신문은 오늘날의 1개 면 크기에 불과한 타블로이드 2개 면으로 제작했지만 뉴스에 목말랐던 국민들의 갈증을 긴급히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10월 중순, 서울 수복 후 첫 대통령 기자회견이 경무대에서 열렸다. 대통령과의 대담이 끝날 때쯤 동아일보의 최흥조 취재부장이 일어나 대통령에게 말했다. “지금 계엄하 국방부 정훈국이 모든 신문을 검열하고 있는데 (…) 이래서는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즉시 “공산당과 전쟁을 하는 까닭은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야. 민주 국가에서 신문을 검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며 신문 검열을 중지하도록 지시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후퇴하면서 동아일보는 1951년 1월 3일 다시 피란을 준비해야 했다. 황망히 해산해야 했던 첫 피란과 달리 이번에는 20명의 사원을 ‘최종 잔류조’로 편성해 정부 각 기관 인원들과 함께 마지막 피란열차를 타기로 했다. 신문 용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김진섭 기자는 “서울역장에게 내가 올 때까지 절대 열차를 출발시키지 말라고 했다. 서울 철도경찰대장의 도움을 얻어 미군 스리쿼터를 얻어 타고 신문 용지를 역까지 실어 날랐다. 이 때문에 열차는 50분 연발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이렇게 실어 나른 신문 용지는 보통 크기의 신문 장수로 2만2000장(4만4000면) 분량에 달했다. 이 덕택에 동아일보는 피란지 부산에서 다른 신문들보다 빨리 1월 10일자로 속간호를 낼 수 있었다.
전시 피란지에서 내는 신문인 만큼 여건은 열악했다. 부산 지역신문 ‘민주신보’의 평판 인쇄시설과 편집국을 빌려 민주신보와 교대하면서 ‘2부제’로 신문을 제작했다. 판매망이 없어 광복동 사거리, 영도 다리, 서면 같은 번화가에 책상을 내놓고 신문을 팔았는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피란 사원들이 많이 참여했다.
부산 속간 만 2년 뒤인 1952년 1월 15일에야 동아일보는 토성동에 임시 사옥을 지어 입주했다. 가두판매로 매일 2만∼3만 부가 팔릴 정도로 동아일보는 피란지 부산에서 인기였다. 판매 대금이 들어오면 곧바로 다음 날 신문 제작에 투입했다. 동아일보는 파괴된 건물과 시설을 정비한 뒤 1953년 8월 18일자를 마지막으로 2년 8개월간의 피란시대를 마무리하고 8월 19일 서울 세종로 사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시간당 5만 장을 인쇄하는 신형 윤전기를 추가 도입해 발행부수 8만 부로 국내 최대 신문 자리를 굳혔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국민방위군 거액로비 사건’ 보도 큰 반향 ▼ 전쟁중 정권비리-탄압 정면으로 맞서
전쟁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아 동아일보는 북한의 반민족적 침략을 규탄하고 국민의 결속을 촉구하며 국군 장병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힘썼지만 이 시기에도 정권의 비리와 언론 탄압에는 분연히 일어나 맞섰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한 정권과의 대립은 그 대표적 사례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예비병력 확보를 위해 소집한 ‘국민방위군’의 사령관 김윤근 준장과 부사령관 윤익헌 대령 등 10여 명이 예산과 물자를 빼돌린 사건을 말한다. 사령관과 부사령관 등 5명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51년 8월 13일 처형됐다. 이 사건으로 음식과 피복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17∼40세 장정 1000여 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병자가 발생했다.
9월 25일 동아일보는 ‘내무부 차관이 9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밝힌 경찰 조서의 내용 때문에 미국대사관이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등 외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서의 내용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부사령관 윤익헌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인이 미대사관 고위층에 거액의 구명운동비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미 대사관은 조서 내용 공개로 인한 명예훼손 등을 문제 삼아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공보처는 ‘해당 기사는 사실무근의 허위이므로 동일한 크기로 취소 기사를 지정하는 날짜에 게재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동아일보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미대사관의 참사관이 내무부 장관을 방문해 항의했음이 사실로 밝혀졌는데도 검찰은 취재기자를 소환해 기사내용을 알려준 정부 관료를 대라고 다그쳤다. 검찰은 대한제국기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만든 광무신문지법까지 끌어들여 11월 9일 편집인 고재욱과 취재기자 최흥조를 불구속 기소했다. 광무신문지법에서 적용한 조문은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국헌을 문란하고 혹은 국제 교의를 저해할 사항을 기재할 수 없다’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를 정면 비판했으며 이를 계기로 대다수 언론사가 일제히 언론 관련 법안의 비민주성과 위헌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중앙청 기자단과 국회·법조기자단은 언론 관련 악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에게 무효화를 건의했다. 국회가 11월 15일 의원 26명의 발의로 언론탄압법인 광무신문지법 철폐에 관한 법률안을 제안하는 등 큰 반향이 일었다. 광무신문지법은 고재욱 편집인과 최흥조 기자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1952년 3월 19일 결국 국회에서 폐기됐다.
“수십만 명의 남녀 및 어린이들은 안전을 찾아 먼짓길을 물결이 되어 피난해 내려갔다. 헤아릴 수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지고 가족과 멀어져 뿔뿔이 헤어졌다.”(스탄리·곳쉬 記)
6·25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난 1960년 6월 25일. 동아일보 2면에는 ‘외국인이 본 6·25’ 시리즈가 실렸다. 이 시리즈는 2회에 걸쳐 개전 직후의 상황과 유엔의 참전, 3년간의 전쟁 끝에 이른 휴전과 원조에 이르는 과정을 회고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해 6월이면 어김없이 6·25를 다룬 기사가 등장했다. 1962년에는 ‘6·25의 유산’시리즈가 5회에 걸쳐 실렸다. 통일의 날 ‘기쁨의 비석’을 세울 곳인 휴전선과 월남피란민, 전쟁고아, 납북인사 가족, 유엔묘지를 다루며 전쟁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전쟁 20돌을 맞았을 때는 납북인사들의 행방을 추적하기도 했다. 1970년 6월 25일자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인사 30명의 행적과 소식을 전했다. 제2대 국회의원인 원세훈은 ‘서울 출신. 북경대학 로문학과 졸업. 임정 참여…자택에 내무서원이 나타나 찝에 태워 납치. 59년 임정 요원들을 국제간첩으로 몰아 처형할 때 희생당했다’고 기록했다.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안재홍 김동원 엄항섭 등에 대한 내용도 함께 실렸다.
헤어진 가족을 그리는 절절한 그리움도 지면에 소개됐다. 1980년 6월 25일에는 시인 김광림 씨(81)가 ‘북의 어머님께’라는 제목의 편지를 썼다. 김 씨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30년이면 무엇인들 변하지 않았겠읍니까. 저는 그동안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읍니다”라고 그리움을 표현하며 “어머니! 어서 길을 트십시다. 마음을 여십시다. 그리고 얼싸안고 30여 년 동안 맺힌 한을 울음으로 풀어 보십시다”라고 마무리했다.
전쟁 발발 50년이 된 2000년에는 남북평화를 위해 전쟁을 되돌아보는 기획이 마련됐다. ‘6·25전쟁 50년’이라는 제목의 이 코너에서는 ‘양민학살과 같은 비인도적 행위도 제대로 짚어야 한다’ ‘문학에서 화해를 이야기하자’와 같은 각계 전문가들의 제언이 소개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6·25 기획은 마련됐다.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와 ‘유물로 만나는 6·25’가 전쟁의 비극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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