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시험’ 고시도 有錢합격 無錢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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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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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생활비 월170만원… 서민은 꿈도 못꿀 ‘등용문’

《“더럽죠. 기분이 더럽죠.”(고시생 A 씨)

“‘너는 안 된다. 장관 딸 정도 돼야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고시생 B 씨)

“‘빽’이라든지 이런 걸로 한 번에 싹 들어가 버리면 열 받죠.”(고시생 C 씨)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빬춤형 특채’ 파동에 이어 연달아 터진 공무원 특채의혹…. 고시촌의 대명사인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만난 고시생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특채 파동의 여파로 외부 전문가 특채를 50%까지 올리려던 행정고시 개편안도 철회됐다. 현행 고시제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 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다지게 됐다.》

“엉덩이에 큰 수술 자국이 있어요. 엉덩이가 좀 아팠는데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계속 공부를 했죠. 알고 보니 종기가 엉덩이 근육을 파고들었어요. 몇 달 뒤 의사가 보더니 ‘당신 참 미련하다’고 하더군요.”

오세훈 서울시장(사법시험 26회)은 30년 전 고시준비생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그땐 참 비참했다”고 했다. 당시 오 시장의 어머니는 집에서 재봉틀을 돌려 만든 이불보를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학비 낼 때가 되면 친척들에게 돈을 꾸러 다녔다고 했다.

‘세탁소집 둘째딸’로 알려진 추미애 의원(사시 24회)도 가난을 딛고 ‘고시 사다리’에 오른 대표적 정치인. 부모가 사기를 당해 세탁소마저 날리고 구멍가게를 열자 추 의원은 학업과 가게 일을 병행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 2학년까지 사법시험 1차를 통과 못하면 장학금을 끊는다기에 배수진을 치고 공부했죠. 집 연탄보일러가 고장 나 골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보는데 어머니가 물그릇이 꽁꽁 얼어있는 걸 보고 한숨을 쉬셨어요.”

오 시장과 추 의원처럼 ‘없는 집 학생’이 고시 사다리에 올라타 한번에 인생역전을 하는 게 지금도 가능할까. 고시촌을 집중취재해 보니 사실상 어려워 보였다. 고시공부가 모두 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행정·외무고시, 사법시험 수험생 10명의 지출명세를 짚어본 결과 한 달 생활비가 120만∼170만 원 선이었다. 요즘 대부분의 고시생은 고시 선배들이 지내던 쪽방형 고시원 대신 에어컨과 세탁기가 완비된 원룸에서 지낸다. 쪽방형 고시원은 인근 달동네로 밀려올라갔다. 부동산 중개인 이충열 씨는 “공부환경도 경쟁력이라 학생들이 갈수록 쾌적한 곳을 찾는다”며 “보통 원룸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 40만 원, 풀옵션은 보증금 500만 원에 월 50만∼60만 원”이라고 말했다.

식사는 매월 식권 값만 20만 원 안팎. 영양보충을 위해 몇 번 ‘외식’을 하면 3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책값도 기본서와 참고서를 제대로 갖추려면 한 해 200만 원이 필요하고, 강의 테이프 등 추가교재까지 사면 400만∼500만 원이 든다. 특히 시험에 떨어지면 판례나 법률이 바뀌고 출제경향도 달라져 책을 새로 사야 한다.

의식주와 책을 해결했다고 고시준비가 끝난 게 아니다. 요즘 수험생들은 매달 15만 원 정도를 내고 독서실에서 공부한다. 독서실에는 에어컨은 물론이고 공기청정기와 산소발생기까지 설치돼 있다. 외시 준비생 이병규 씨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고시공부의 특성상 경쟁자들과 함께해야 긴장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가장 큰 부담은 학원비. 학원은 선택사항이지만 사실상 필수다. 사시 준비생 최진경 씨는 “공부할 게 워낙 방대하고 문제가 오랫동안 축적돼 핵심을 짚어주고 출제경향을 분석해주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빨리 가는 지도가 학원에 있는데 누가 혼자 공부하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사법시험 2차 헌법과목에서 강사들이 지목한 사법부 독립 관련 판례가 100점 만점에 50점 배점으로 출제되는 등 학원의 예상문제가 적중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16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서 한 수험생이 고시학원 광고를 살펴보고 있다. 고
시촌에 ‘헝그리 고시생’들이 설 땅을 잃게 되면서 ‘유전 합격, 무전 불합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6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서 한 수험생이 고시학원 광고를 살펴보고 있다. 고 시촌에 ‘헝그리 고시생’들이 설 땅을 잃게 되면서 ‘유전 합격, 무전 불합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학원비는 종합반의 경우 1년에 보통 500만∼600만 원이 든다. 최근에는 소수 인원을 상대로 강사들이 일대일로 가르치는 2000만 원짜리 고액과정도 생겼다. 일부 수험생은 고시 합격생한테서 월 200만∼300만 원을 주고 과외를 받기도 한다. 추 의원은 “내가 공부하던 1970년 후반에는 학원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학교나 절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자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독서실 총무로 일하는 한 행시 준비생은 “남들은 24시간 풀가동하는데 저는 그중 6시간을 빼야 하니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행시 준비생은 “경제적으로 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고시 도전은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고시가 서민들로부터 멀어지는 추세는 고시 합격자들의 출신 배경으로도 확인된다. 최근 10년간 판사로 임용된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출신고를 분석한 결과 외국어고 등 특목고와 서울 강남지역 고교 출신이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37%에 달했다.

민주당 오제세 장세환 김유정 의원이 정부 부처에서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최근 5년간 행정고시 합격자를 합산한 결과 특목고와 자립형사립고, 서울 강남지역 고교 출신이 48%였다.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행시 24회)은 15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경제력이 당락에 영향을 주는 건 불공정한 경쟁”이라며 “EBS 수능 강의처럼 고시 과목도 방송통신대에서 인터넷 강의를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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