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8월 2일 이른바 ‘언론윤리위원회법’이 여당인 공화당의 주도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 법안의 골자는 언론윤리위원회가 특정 언론사를 회원사에서 제명할 수 있으며 정부가 언론사에 ‘적절한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론윤리위원회가 정부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것이 명백한 만큼 이 법의 국회 통과는 정부가 사실상 언론사의 생살여탈권을 쥐었음을 의미했다.
그러자 한국신문발행인협의회, 한국신문편집인협의회 등 5개 단체로 구성된 언론규제대책위원회가 언론윤리위원회법 폐기를 선언했다. 대책위원회는 곧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로 개편됐고 신문 방송 통신 잡지에 종사하는 언론인 대표 500여 명이 모여 악법 철폐를 요구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빠졌다. 언론사들이 잇달아 투쟁 운동에서 이탈했다. 언론윤리위원회 소집 여부에 대한 찬반을 묻는 한국신문발행인협의회의 질의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곳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대구 매일신문 등 4개사뿐이었다. 이에 4개사를 표적으로 한 정권의 보복이 노골화하면서 해당 언론사와 기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종군기자로 베트남에 갈 예정이었던 동아일보 사회부 윤양중 기자가 여권을 압수당했으며 함정 승선 등에 아무런 편의를 주지 않겠다고 통보해 왔다.
9월 1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대구 매일신문 등 4개사 편집국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반대하는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보복조치가 이성을 상실한 처사라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한국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언론 창달을 위해 (…) 끝까지 투쟁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9월 2일자 동아일보는 전 8개 면 중 2, 3면을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특집으로 채웠다. 조지훈 시인, 박용구 음악평론가, 김태길 서울대 철학과 교수 등이 ‘헌법에 없는 폭거 말라’ ‘언론의 운명은 국민의 운명’ ‘정부는 스스로 조포(弔砲)를 울리는 짓을 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알려왔다. 1면 톱기사는 함석헌 장준하 한경직 씨 등 학계와 종교계를 총망라한 재야인사들이 궐기해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아일보가 굽히지 않는 투쟁의 뜻을 굳건히 밝히자 독자들의 격려 전화와 전문, 편지가 빗발쳤다. 한 독자는 ‘굽히지 말라, 국민은 정부보다 변절 언론인을 더 규탄한다’라고 쓴 혈서와 성금 30만 원을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 정부의 언론탄압이 이슈가 됐다. 국제언론인협회(IPI)의 알란 허넬리우스 회장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정치성을 띤 언론윤리위원회와 법을 이용해 신문을 억압하는 것은 민주적 표현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독재정권만이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항의 전문을 보냈다. 나라 안팎의 비난이 쏟아지자 정부는 9월 9일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전면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언론의 투쟁은 국제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5년 5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IPI 제14차 총회에서 고재욱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은 ‘자유언론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고재욱 당시 주필은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이었으며 대정부 투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해 승리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32개국 신문발행인과 편집인 등 320여 명이 참석한 IPI 런던총회에서 베리 빙햄 IPI 이사장은 고 주필을 단상으로 불러냈다. “한국 신문인들은 우리 자신이 윤리 법규의 수호자로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신문의 역할을 다한다는 신념과 이상을 지켜냈다”는 고 주필의 연설에 커다란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정권은 집요했다. 이듬해인 1965년 7월 2일 ‘비밀보호와 보안조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 국가기밀 보호라는 명분 아래 정부의 공식 발표문 외에는 거의 보도할 수 없을 정도로 언론을 통제하겠다는 게 이 법안의 의도였다. 법안이 임시국회에 상정될 예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계가 다시 반대 운동에 나섰다. 야당과 대한변호사협회도 이에 호응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럼에도 10월 정부는 다시 ‘신문 통신 등 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극비리에 마련했다.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국위를 손상하는 경우, 공서양속을 해치는 경우, 기밀을 누설해 국가이익을 손상하는 경우 등을 기존 등록취소 요건에 추가한다는 내용으로, 정기간행물의 등록취소 요건 범위를 넓혀 사실상 언론을 규제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법안 역시 언론계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신동아 ‘차관 망국론’ 특집으로 ‘필화’ 겪어 ▼
1968년 12월 월간 신동아는 정부의 차관도입 관련 문제를 심층 분석한 ‘차관망국론’ 특집을 실었다. 1959년부터 들여온 차관 12억8100달러의 명세와 함께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던 이 ‘빚’이 한국 경제에 끼친 공과(功過)를 검토한 내용이었다. 원고지 200장 분량으로 정치부 김진배 기자와 경제부 박창래 기자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차관의 실질적 가치를 냉정히 평가하면서 쌍용, 럭키, 한국화약 등 차관 특혜를 받은 일부 재벌기업의 시장 독점으로 인한 폐해, 정치자금과의 상관성을 파헤쳤다.
“지불보증으로 들여오는 외국 빚으로 공장을 세우고 수출을 촉진해 고용을 늘리며 결과적으로 국민소득을 늘리는 공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오는 차관이 정치 자금의 파이프라인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기사가 나간 뒤 기자와 신동아 실무진이 차례로 검거됐다. 박창래 기자는 11월 23일 오전 출입처인 수산청 기자실에서 중앙정보부원에게 연행돼 27일까지 조사를 받았다. 정보부는 26일 신동아부 사무실을 뒤져 기사 원고를 가져갔다. 김진배 기자는 한국기자상 수상을 계기로 기자협회가 마련한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25일 귀국하자마자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정보부로 연행돼 30일까지 취재와 집필 경위를 조사받았다. 홍승면 신동아 주간, 손세일 신동아부 부장, 유혁인 정치부 차장도 연행돼 심문을 받았다.
11월 29일 동아일보는 1면 기사에 “정보부가 ‘차관’ 기사와 관련해 기자들을 반공법 혐의로 심문 중”이라고 보도했다. 2면에는 ‘신동아 필화’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문제가 된 기사는 차관의 성과를 충분히 인정해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정치에 결부된 무원칙하고 특혜적인 일면의 심각한 부작용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정부는 차관의 긍정적 성과를 선전하는 만큼의 성의를 가지고 부작용이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소신을 국민에게 합리적으로 납득시켜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부가 아니 한 일을 기자가 한 것이다.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벌을 주겠다는 것인가.”
정보부는 ‘차관’ 기사만으로는 문제 삼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자, 1968년 10월호에 나간 미국 미주리대 조순승 교수의 글 ‘북괴와 중소(中蘇) 분열’을 빌미로 12월 3일 김상만 발행인 겸 부사장과 천관우 편집인을 연행했다. 영문을 번역한 글에서 ‘leader’를 ‘공비 두목’이라 하지 않고 ‘빨치산 운동 지도자’라 한 것을 트집 잡은 것이다. 12월 7일 동아일보는 1면에 “영어 원문 오역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크게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충심으로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라는 사고를 게재해야 했다.
12월 10일 동아일보사 이사회는 천관우 편집인 겸 주필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에 앞서 9일 홍승면 주간과 손세일 부장은 석방되자마자 해임됐다. 김진배 기자는 출판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상만 부사장도 발행인 직을 내놓아야 했다. 고재욱 사장은 1969년 1월 1일 신년하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혹한 시련 속에 한 해를 보내고 다시 한 해를 맞이합니다. 안이하게 술에 취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침통하고 착잡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고, 지혜를 모아 난관을 뚫고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67년 창간 47년만에 50만부 돌파… 고급지 대중지 방향 논쟁 ▼
1967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47주년을 맞았다. 이날 동아일보는 한국 신문 사상 처음으로 발행부수 50만 부를 돌파했다. 기념호 1면에는 52만3000호를 인쇄 배부했다고 기록했다. 1956년 여름 30만 부, 1963년 40만 부를 넘어선 뒤 4년 만에 50만 부를 돌파한 기록이다.
동아일보는 한국 언론 사상 유례없는 독자들을 확보하면서 지면의 방향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벌였다. 50만 명이 넘는 독자가 읽어야 할 것을 취사선택해서 보도 평론하는 고급지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의 눈길이 쉽게 가는 소재에 집중하는 대중지가 될 것인지를 두고 토론이 펼쳐진 것이다.
1967년 7월 5일 고재욱 사장, 김상만 부사장, 천관우 주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정책위원회에서는 “지금 동아일보에 읽을거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타락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3면은 성관계와 범죄사건으로 어두울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논의 끝에 “1차적으로 품위 있는 신문을 제작하고 그다음으로 팔리는 신문을 만든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급지와 대중지 사이를 오가는 고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70년 3월 1일 주당 발행면수를 36면에서 48면으로 늘리면서 안팎의 의견을 다시 한 번 취합했다. 이를 통해 ‘국민생활에 보탬이 되는 뉴스를 국민이 얻을 수 있도록 보도할 것’ ‘고급지적 방향을 견지하되 대중적이어야 한다’ 등 지침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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