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남자고등학교 1학년 교실. 3교시 수업이 끝나자 학생 10여 명이 장모 군(16·서울 종로구) 주위에 몰려들었다. 바로 ‘판치기’를 하기 위해서다. 판치기란 고교생들이 돈을 걸고 하는 일종의 게임. 교과서나 문제집을 밑판으로 삼아 그 위에 100원짜리 동전들을 ‘판돈’으로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밑판을 강하게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동전들이 뒤집어져 모두 같은 면이 나오면 동전을 모두 가져간다.
장 군은 책상 서랍 속에서 두꺼운 수학 문제집을 하나 꺼냈다. 책 표지를 돌돌 말아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만드는 ‘엠보싱’ 작업을 거친 뒤 100원짜리 동전 네 개를 올려놓고 게임을 시작했다. 참여 학생은 4명. 학생 한 명은 교실 뒷문을 지키며 선생님이 오는지 ‘망’을 봤다.
게임이 시작된 지 2∼3분 후, 장 군이 동전을 모두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장 군은 100원짜리 동전 4개를 가져가는 대신 게임에 참여한 학생들로부터 1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씩 받는 게 아닌가. 이날 벌어진 판치기는 일주일에 3, 4회 벌어지는 ‘이벤트성 게임’으로 실제 걸려있던 판돈은 400원이 아니라 총 4만 원이었던 것이다.
“반 학생 10명 중 8명이 쉬는 시간에 판치기를 해요. 단순한 게임이지만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해본 애들은 끊을 수 없어요. 쉬는 시간마다 판이 벌어지다 보니까 판돈이 100원짜리인 판에만 참여해도 하루에 1만 원을 넘게 따가는 친구도, 1만 원을 넘게 잃는 친구도 있죠.”(장 군)
고교생들의 ‘돈 내기 놀음’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100원짜리, 1000원짜리 내기는 어느새 내기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게 고교생들의 전언. 적게는 5000원부터 많게는 1만 원짜리 내기까지 액수가 커졌다고 한다.
고2 이모 군(16·서울 은평구)은 “마술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학교에 카드를 가져와 쉬는 시간 포커게임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면서 “한 판에 최소 1만 원, 최대 3만 원까지 돈이 오고 갈 정도로 부담스러운 액수지만 재미있다는 이유로 서로 게임을 하겠다며 경쟁이 붙는다”고 전했다.
‘가위 바위 보’ 같은 간단한 놀이에도 돈이 걸린다. 서울의 한 고교에선 한 판에 적게는 5000원, 많게는 1만 원이 걸린 ‘가위 바위 보’ 게임이 성행한다. 쉬는 시간이면 반마다 10여 명이 함께 모여 게임을 한다. 혹시 게임에 지고도 돈을 내지 않는 사람이 생길 경우에 대비해 교과서 밑에 판돈을 미리 넣어두고 게임을 시작한다.
쉬는 시간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도 쪽지에 가위 바위 보 중 하나를 적어 친구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한다. 이 학교 2학년 박모 군(16·서울 강남구)은 “보통 내기에서 잃는 돈은 일주일에 2만∼3만 원으로 학생에겐 꽤 큰 액수”라며 “쉬는 시간 딱히 즐길 만한 놀이가 없어 많은 학생이 자주 가위 바위 보 게임에 참여한다”고 했다.
카드나 판치기 같은 게임을 비교적 즐기지 않는 여학생들은 생활 속에서 갖가지 내기거리를 찾는다. 특정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지 미리 예측한 뒤 맞히는 사람에게 판돈을 모두 거두어주는 것. ‘수업시간 교사가 출석번호 몇 번 학생에게 발표를 시킬 것인지’ ‘A 남학생과 B 여학생이 사귈 것인지’ ‘특정 남녀학생 커플이 언제 헤어질 것인지’ 등 내기 소재도 기상천외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
서울의 한 여고 1학년 교실에선 얼마 전 반 전체 학생인 31명이 수업시간마다 모두 내기에 참여하는 웃지 못할 풍경도 벌어졌다. 수업시간 쪽지를 돌리다 선생님에게 걸리는 사람이 3000원씩 벌금을 내기로 한 것. 자기 이름이 적힌 쪽지를 친구로부터 건네받은 학생은 다시 다른 친구의 이름을 새로운 쪽지에 적은 뒤 그 쪽지를 해당 친구에게 선생님 몰래 건네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교시부터 7교시까지 계속된 내기에서 모인 돈은 2만1000원. 모두 반 학생들의 간식비로 사용됐다.
이날 내기에 참여한 김모 양(15·서울 노원구)은 “그날은 유독 내가 선생님에게 자주 지적받은 탓에 한 달 용돈 5만 원 중 1만 원을 잃었다”면서 “선생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내기 특유의 재미와 긴장감 때문에 수업시간 50분 내내 쪽지 하나에 열중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이렇게 돈 내기에 ‘중독’되어 있다 보니 내기할 돈을 전담해 빌려주는 학생마저 생겨났다. 이른바 ‘캐시맨(cash man)’이라 불리는 이 학생들은 쉬는 시간 내기가 일어나는 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6개월째 캐시맨으로 활동해왔다는 서울의 한 고교 2학년 김모 군(16·서울 강남구). 김 군의 책가방과 지갑은 100원, 500원짜리 동전으로 가득하다. 학기 초 판치기를 하다 동전이 다 떨어지면 다른 친구들에게 동전을 빌리는 학생이 적지 않음을 눈치 챈 그는 ‘돈을 주고 이자를 받으면 용돈을 벌 수 있겠다’란 생각에 캐시맨 ‘영업’을 시작했다. 한 교시가 지날 때마다 100%의 이자를 받아 챙긴다. 500원을 빌려줬을 때 1교시 뒤 갚으면 원금과 더불어 500원의 이자를 추가로 받고 2교시 뒤 갚으면 1000원의 이자를 받는 것. 최대 ‘대출한도’는 500원이라고 한다.
김 군은 “비록 한 번에 빌려주는 액수가 적지만 ‘고객’이 많아 하루에 2000∼3000원은 벌 수 있다”면서 “학기 초에는 같은 반 친구만 나의 존재를 알았지만 요새는 다른 반에서도 동전을 빌리러 온다”고 말했다.
요즘 적잖은 고교생이 돈 내기 놀음에 중독되는 이유는 뭘까. 서울의 한 고등학교 정모 교감은 “평소 친근하게 생각했던 연예인들이 도박을 즐겼다는 사실이 최근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몇백 원이 걸린 도박을 ‘놀이’ 정도로 잘못 생각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면서 “내기 놀음에 참여하는 순간 스스로 주위 친구들에게 주목받거나 적어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교육전문가들은 내기 놀음이 주로 이뤄지는 쉬는 시간엔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독서나 축구 등 자기계발 활동을 하면서 청소년기의 관심과 에너지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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