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충남 서산시 부석면 AB방조제 인근 농지. 이종선 AB지구경작인연합회장(왼
쪽)이 백수현상으로 쭉정이가 된 벼를 보여주고 있다. 뒤편 들녘의 벼는 모두 백수현상
으로 수확이 어려운 형편이다. 서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3일 오후 3시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AB방조제 지구 들녘. 동아시아 최대의 철새 도래지인 이곳에는 이미 겨울 철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황금빛인 들녘의 벼는 차가운 해풍을 맞아 벼가 여물지 못하고 하얗게 변하는 ‘백수현상’으로 고사 상태였다. 현장에서 벼를 한 움큼 잡은 AB지구경작인연합회 이종선 회장은 “낱알이 거의 없거나 절반도 안 되는 쭉정이”라며 “농민들이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지난달 1일 상륙했던 태풍 ‘곤파스’로 인한 백수현상으로 충남 서산과 태안, 당진, 홍성 지역 농민들의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다. 농민들은 충남도와 정치권의 무관심이 극에 달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 “차라리 불태우고 싶다”
4일 충남도에 따르면 곤파스 때문에 백수현상 피해를 본 농지는 1만5372ha(약 4650만 평). 이 가운데 1만 ha에 이르는 AB지구는 피해액이 5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시 관계자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피해를 적게 봤지만 미곡처리장들이 미질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며 수매를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백수현상이 나타난 벼는 수확도 소각도 어려운 형편이다. 볏짚도 염분이 많아 쓸모가 없어졌지만 그대로 두자니 비정상적인 낱알이 싹을 틔워 내년 수확기에 미질을 떨어뜨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확을 한다 해도 건질 게 없다. 노상근 서산시 주민지원국장은 “AB지구 농민들이 수확을 못할 바에야 차라리 불을 지르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최대 철새 도래지가 훼손되는 데다 이제 막 도착한 철새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 태풍 루사 때 수준으론 보상해야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달 28일 서산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백수현상 피해농가에 파종비 지급 기준으로 ha당 110만 원을 지급하기로 정부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 액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 회장은 “ha당 수입이 1000만 원가량이지만 현재 수확할 것이 사실상 거의 없는 상황에서 피해액의 10%를 보상하겠다면 차라리 거부하는 게 낫다”며 “임차농이 50%를 넘는 점을 감안해 임대료인 ha당 300만 원은 지급해야 영농을 재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산시는 “2002년 태풍 루사 피해 당시 정부가 일부 규정을 고쳐 ha당 300만 원 가까운 보상금을 지급한 선례가 있다”며 “이런 건의를 해보았지만 정부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귀띔했다.
이런 가운데 상급 자치단체와 정치권의 무관심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크다. 세계대백제전은 수시로 방문하는 안 지사가 곤파스 피해 초기에 재해현장을 한 번 다녀갔을 뿐 백수현상이 나타난 이후에는 거의 찾지 않는다는 것. 피해지역 농민들은 “안 지사뿐만 아니라 지역 국회의원들조차 피해 지역에 나타나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해 피해 복구와 보상이 늦어지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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