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학교’는 6월 지방선거에서 진보 성향 교육감들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다. 지역별로 명칭은 달랐지만 학교 운영 및 교육과정의 자율권부여, 교사 초빙권 부여 등의 내용은 같았다.가장 앞서가고 있는 곳은 경기교육청으로 김상곤 교육감은 지난해 취임 때부터 추진해 현재 혁신학교 43곳을 운영하고 있다. 전남교육청은 2학기부터 무지개학교 8곳을 시범운영하고 있고, 강원교육청은 최근 ‘강원행복+학교’ 9곳을 선정했다. 전북교육청은 다음 달 희망학교 10곳을 선정할 예정이고, 서울교육청은 내년 혁신학교 40곳을 우선 지정할 계획이다.》
제주형 자율학교로 본 혁신학교 성패 예상도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추진하는 혁신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2007년부터 운영한 제주형 자율학교(i-좋은학교)가 그 해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제주형 자율학교는 교육과정 및 학교경영의 자율권을 부여해 특성화된 학교로 현재 25곳이 운영되고 있다.
○ 입시교육 무시하지 못하는 현실
김녕중의 창의 조형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다양한 물건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수업은 주 3회 1시간씩 학생들이 선택해 각종 체험활동을 하는 ‘스펙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11일 제주형 자율학교인 신엄중학교의 1학년 영어 말하기 시간. 원어민 제이슨 교사가 “센트럴파크에 어떻게 가는지 말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김모 양이 외국 교과서 속 지도를 보고 영어로 막힘없이 답변했다. 서희순 교사는 수업시간 내내 지켜보며 원어민 강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을 때만 설명을 도왔다.
영어 활성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신엄중은 주당 영어과목 시수를 1시간씩 늘렸다. 또 원어민 교사가 한국인 교사와 함께 외국 교과서로 말하기·듣기·쓰기·문법·독해 수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자율학교는 국어·사회·도덕을 제외한 교과는 수업시간의 2분의 1 범위 내에서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 영어는 외국교과서를 쓸 수도 있다.
방과후 학교 특성화프로그램에도 무학년제 토익반과 중급회화반 등을 운영하고 있다. 고희권 교장(57)은 “검정교과서를 쓰지 않는다고 하자 처음에는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3 학부모들이 불안해했지만, 결국 고입 진학률도 올라 이제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주형 자율학교인 김녕중학교도 학력향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영어와 수학을 1시간씩 늘려 수준별 이동수업을 하고 있다. 강영종 교장은 “학생들의 실력에 맞게 수준별 수업을 실시한 덕분에 올해 제주도교육청으로부터 ‘학력향상 최우수학교’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신엄중 1학년 영어 말하기 시간에 학생들이 원어민 교사와 함께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하고 있다.제주도교육청 장학지원과 정은수 장학사는 “초등학교는 교육과정 자율권을 최대한 활용한 각종 인성교육 및 체험활동 프로그램으로 매우 성공적이지만, 중학교는 고교 입시 때문에 어렵다”며 “중학교는 대부분 학력위주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2008년 실시한 자율학교에 대한 학부모·교사·학생의 종합평가만족도 결과도 초등학교(93.6%)가 가장 높고, 중학교(84%), 고등학교(79.2%) 순이었다.
교육 전문가들은 “혁신학교를 중·고등학교 위주로 진행하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한 전문가는 “중학교부터 특목고 입시에 매달리는 상황에서 창의·체험활동을 중요시하는 교육과정은 학부모나 교사, 학생들 모두가 선호할 수 없다”며 “특히 대부분 혁신학교를 세우려는 낙후지역은 창의인성 교육보다 학력향상 프로그램이 더 유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곽노현 서울교육감은 “특목고와 대학 입시로 시달리는 중학교부터 혁신학교를 시작해 공교육의 새 표준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 시교육청 관계자는 “간부회의에서 (곽 교육감에게) 혁신학교를 중학교 위주로 하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조언이 나온다”며 “엄마들이 학력 위주가 아닌 체험활동 중심의 수업을 인내할 수 있는 건 초등학교까지다”고 말했다.
○ 예산 부족과 교원 업무 과중
제주형 자율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들은 모두 예산지원의 지속성과 재지정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1기 자율학교들은 학교당 2억 원씩 지원받았지만, 2기 자율학교들의 경우 재지정된 학교는 7000만 원, 신규 지정 학교는 1억 원씩 지원받았다. 총 30곳을 선정할 예정인 3기 자율학교들은 ‘지정은 하되 지원금은 없다’는 게 도교육청의 원칙이다. 정 장학사는 “프로그램의 지속성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예산을 지원할 수도 없고, 다른 학교와의 형평성 때문에 고민”이라고 말했다.
한림여중에서 학생들이 ‘미래의 명함 만들기’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수업은 인성교육 ‘꿈비디(꿈과 비전을 디자인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제주=최예나 기자 yena@donga.com이에 대해 신엄중 교장은 “3기도 신청하고 싶은데 예산지원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줄어들어 기존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녕중 교감도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3년은 해봐야 성과가 나는데 2년 만에 평가하고 재지정 여부를 결정한다”며 “재지정이 안되면 예산이 끊겨 다시 (학생이 줄어 폐교 위기의) 어려운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계에서는 혁신학교도 같은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진보 성향 교육감들 모두 무상급식 추진을 내걸고 있는 상황에서 한번 혁신학교로 지정하면 매년 학교당 1억∼2억 원씩 투자해야 하는데 그 예산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 교육계 인사는 “몇 년 하다 지원을 끊으면 학교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각종 시범학교류(類)의 사업으로 변질돼 실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교사들의 과중한 업무 부담도 넘어야 할 과제다. 혁신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의 교육철학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지정 이후의 성공은 모두 교원에게 달렸다. 그러나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추진하는 혁신학교는 대부분 교사의 자발성을 기초로 교원들에 대한 승진 가산점은 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교원들이 임기를 마친 뒤 다른 학교로 떠날 경우 교육 프로그램 전반이 흔들리게 된다는 문제도 있다.
제주도의 경우 자율학교에 근무하는 전체 교원에게 도 지정 연구학교 근무 가산점만 부여한다. 이에 대해 한림여중 교장은 “학교장에게 자율학교 운영에 필요한 교원의 임용 또는 전보유예 요청 등 인사자율권이 있어 부담을 견딜 수 있는 교사만 남는다”면서도 “교원의 열정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운영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 학교 강경애 교사는 “일반 수업 준비 외에 자율학교 프로그램 운영에 따른 교재 연구 등에 쏟는 시간이 많아 솔직히 힘들다”며 “교사들이 ‘i-좋은 학교’는 ‘아이만 좋은 학교’라는 이야기도 하지만, 행복감 때문에 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