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했지만… 56년 맞고 산 처지 딱해”

동아일보
입력 2010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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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우발적인 살인을 한 할머니 처지가 너무 딱합니다.” 4일 오후 3시경 광주지검 순천지청 청사 2층 회의실. 9명으로 구성된 검찰 시민위원들이 살인 혐의로 구속된 유모 할머니(76)에 대해 구속 취소 처분을 내려 달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시민위원 황모 씨는 “유 할머니가 죄를 지었지만 평생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만큼 불구속 재판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권고를 받아들여 유 할머니에 대해 구속취소를 결정했다. 이날 유 할머니는 17일 동안 있던 순천교도소에서 풀려나는 순간에도 조사를 받으러가는 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유 할머니는 이날 딸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갔다.

20세에 결혼한 유 할머니는 결혼생활 내내 매를 맞고 살았다. 수사를 담당했던 전남 고흥경찰서 관계자는 “유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잦은 폭행에 시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유 할머니는 1남 7녀를 두고 있다. 유 할머니는 사건 당일에는 난치성 질환 치료를 거부하는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폭행당했다. 평생을 참았지만 그날만큼은 맞대응을 하다 뜻하지 않은 살인을 저지르게 됐다.

검찰에 송치된 유 할머니는 조사과정에서 “죄인인 만큼 교도소를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남편 제사를 챙겨야 한다”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유 할머니의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상담을 받도록 했다. 상담 결과는 “유 할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 더 안정될 것”이라는 것.

사실 검찰도 유 할머니를 구속할 생각은 없었다. 고령인 데다 사연이 너무 딱했기 때문.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죄책감을 드러낸 유 할머니가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해 구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 시민위원들이 구속 취소 의견을 낸 데다 의료진도 “딸들과 같이 지내면 괜찮을 것”이라는 소견을 내놓자 검찰이 ‘결단’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전남가정폭력상담센터 등 여성단체들의 탄원서도 검찰을 움직이게 했다. 검찰 시민위원회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유 할머니가 장기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도록 방치한 사회의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순천=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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