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하버드대 법대 아시아계 여성 첫 종신교수 임용 석지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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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13일 03시 00분


“종신교수는 전환점일 뿐… ‘훌륭한 교수’ 되려면 더 먼 길 가야”

미국 하버드대 법대에서 동양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종신교수에 임용된 석지영 교수는 “인생의 여러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며 “아직 내 인생을 평가받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대 법대에서 동양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종신교수에 임용된 석지영 교수는 “인생의 여러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며 “아직 내 인생을 평가받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지난달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하버드대 법대의 종신교수로 임용된 석지영(미국명 지니 석·37) 교수.

강의 준비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다는 석 교수에게 인터뷰 요청을 한 지 한 달 만인 9일(현지 시간) 그를 만났다. 이날 석 교수가 일 때문에 뉴욕대 법대를 방문해 인터뷰는 뉴욕대 법대의 한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한국어를 할 수 있지만 영어로 말하는 게 편하다는 석 교수의 요청으로 인터뷰는 영어로 이뤄졌다.

석 교수는 자신이 이뤄낸 결과에 대해 “인생의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돌았다”며 “앞으로 훌륭한 교수가 되기 위해 먼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법대의 종신교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꿈이 실현된 것 같은 기분인가.

“솔직히 말하면 꿈이 실현됐다는 기분은 아니다.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까. 2006년 이 대학 법대 교수가 된 것이 큰 전환점이었고 종신교수직을 받은 게 또 다른 분수령이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일해 왔는지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니 기분은 좋다.”

―뭔가 성취했다는 느낌은 클 것 같다.

“아직 나 자신을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교수를 시작한 지 4년밖에 안 된다. 앞으로 갈 인생이 길다.”

―4년 만에 종신교수가 된 게 빠른 편인가.

“통상 종신교수직을 받기 전에 4∼6년간 조교수로 생활해야 한다. 4년이면 특별히 빠른 것도 아니다. 지난해에도 2명이 4년 만에 종신교수직을 받았다.”

―다음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훌륭한 교수가 되는 것이다.”

―종신교수가 된 후 생활에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누군가에게 평가받는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종신교수가 되기 전의 기분이 그렇다.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해도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그런 부담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느낌이다.”

하버드대 법대에서 종신교수직을 받으려면 100명이 넘는 법대 종신교수의 투표를 거쳐야 한다.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석 교수는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버드대 법대생이 되기도 힘든데 하버드대 법대 교수가 되기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제 경우에는 하버드대 법대 교수가 학생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지금은 내가 하버드대 법대생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웃음). 하버드대 법대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겨운 일정이다. 매일 테스트에 시달리고 매일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 시험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요즘도 하버드대 법대생인데 학교 교실에 들어가지 못해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악몽을 꾼다. 물론 하버드대 법대에 다닐 때 그런 상황은 한 번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법이 좋아 교수까지 되지 않았나.

“법을 공부하는 게 너무 좋았다. 하버드대 법대에 다니기 시작한 첫날부터 난 법과 사랑에 빠졌다. 내가 법을 공부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 그 일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행운아다.”

―대법원 판사 서기와 검사로도 일한 경력이 있던데….

“워싱턴DC 순회법원 판사와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했고 1년간 검사로 일했다.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버드대 법대 교수들은 대부분 교수가 되기 전 실전 경험을 쌓는다. 한두 차례 서기 일을 하고 변호사나 검사 등의 경험을 쌓은 뒤 교수직에 지원한다.”

―법대 교수가 어렸을 적 꿈꾸던 일이었는가.

“어렸을 때는 법대 교수가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법대 교수가 되고 싶었던 것은 하버드대 법대에 들어온 뒤였다. 첫 학기에 몇몇 교수님께서 나에게 교수가 되어 보라고 권하셨다.”

―당시 교수들이 어떤 이유에서 법대 교수를 권했다고 보는가.

“강의시간에 내가 발표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서 교수의 자질을 본 것 같다. 분석적 태도와 날카로움, 폭넓은 시각에서 법과 사물을 보는 관점 등을 내게서 본 게 아닌가 싶다. 이런 것은 좋은 변호사의 자질과는 좀 다른 것이다. 좋은 교수가 되려면 사법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폭넓은 시각에서 법 제도의 경향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버드대 법대 교수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각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될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큰 도전이다. 정부기관이나 법조계, 경제계를 이끌어갈 장래의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의식을 일깨워주고 영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단순히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나중에 대중을 위해 일할 사람을 가르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다. 강의시간이 끝나고 나면 벌써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

―보통 바쁜 게 아닌 것 같다.

“사실 눈코 뜰 새 없다. 단순히 강의만 한다면 훨씬 쉽겠지만 그렇지 않다. 강의 준비도 만만치 않은데 논문도 써야 하고 행정적인 일도 많고, 학생들도 만나야 한다. 일반인이나 다른 교수 강의시간에 강의를 하는 일도 있다. 마치 저글링을 하는 것 같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최근 5년 동안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일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중에도 하루에 몇 시간은 쪼개서 아이들과 남편하고도 시간을 보내야 하고 집 안도 너무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사교생활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일을 하기 일쑤였고 주말도 마찬가지다.”

같은 하버드대 법대 교수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노아 펠드먼 씨가 남편이며 5세 아들과 3세 딸이 있다.

―불문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다시 하버드대 법대에 입학한 이유는….(석 교수는 예일대에서 영문학 불문학을 전공했고 영국 정부가 주는 마셜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대에서 불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법대에는 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등 다양한 학문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온다. 나라고 특별한 건 아니다. 미국의 법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가운데 마셜장학금을 받는 행운이 왔다. 옥스퍼드대에서는 법이 아닌 좀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다.”

―문학과 법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문학과 법은 실제로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문학과 법 모두 쓰인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문학은 쓰인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런 단어들이 쓰인 것인지, 단어들이 어떤 구조에서 문장을 이루고 있는지 공부한다. 법도 마찬가지다. 법조인들은 법조문 판례 글로 된 법적 의견문 등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공부한다. 내가 하버드대 법대생들에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 중 하나가 법조문을 제대로 읽는 법이다.”

―언제부터 법대에 가고 싶어 했나.

“대학에 다닐 때였다. 고홍주 당시 예일대 법대 교수의 글을 많이 읽었다. 신문에서 고 교수가 중요한 인권사건에 대해 주장을 펴는 글을 읽었다. ‘와, 이렇게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도 의미가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법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법은 한편으로는 권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권위의 행사를 제한하는 수단이다. 또 인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제약을 가하는 것 아니겠는가.”

―뉴욕의 유명한 헌터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세계적인 발레학교(the School of American Ballet)도 다녔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피아노도 공부했다. 어렸을 때 생활은 어땠나.

“사실 내가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었다. 내 또래의 많은 아이와 비슷한 생활이었다. 여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건너왔다. 그렇게 풍족한 생활이 아니었고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석 교수의 부친은 뉴욕에서 개업하고 있는 소화기 내과전문의 석창호 씨이고 글로벌 어린이재단 뉴욕지부 최성남 회장이 모친이다. 부친은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병원 내과에서 수석레지던트로 일했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했다고 하던데….

“1985년부터 3년 정도 발레를 했다. 13, 14세 때는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하지만 15세가 됐을 때 헌터 중고등학교를 그만두든지, 발레학교를 그만두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부모님은 내가 발레를 계속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이민자가 아니었다면 공부도 하고 발레도 하는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시아계 여성으로 ‘유리 천장’을 경험한 적은 없는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다. 사실 나는 ‘유리 천장’을 느낀 적이 없었다. 미국에 아시안 또는 아시안 여성에 대한 유리 천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운이 좋아서 그런 차별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교수님처럼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

“정말 하고싶은 일을 찾으면 열정이 솟아요”

2006년 하버드대 법대의 첫 한국인 교수가 된 지 몇 년 안 돼 첫 아시아 여성 종신교수까지 된 석지영 교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발레를 포기하면서 그걸 느꼈다”며 “내가 그토록 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뼈아픈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한동안 발레의 꿈을 포기한 아픔을 잊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아픔을 잊을 수 있었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았다고 했다.

석 교수는 부모들에게는 “자녀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더 큰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나도 내 아이들에게 억지로 피아노 연습도 시키고 수학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시키고 싶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하지만 지금은 조금 뒤로 물러서서 아이들에게 여러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내 아이에게 음악도 시키고, 발레도 시키고, 태권도도 하게 하는 등 내 아이가 여러 가지를 해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돌잔치 때 아기 앞에 여러 가지를 놔두고 뭘 집는지 보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석지영 교수::

―1973년 서울 출생
―1979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1995년 예일대 영문학 불문학 학사
―1999년 영국 옥스퍼드대 불문학 박사
―2002년 하버드대 법대 졸업
―2006년 하버드대 법대 첫 한국인 교수
―2010년 하버드대 법대 첫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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