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식당 밀집 지역으로 알려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 최근 예술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만드는 ‘예술 동네’로 변모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굴다리 입구가 지역 주민 70명이 직접 그린벽화로 거듭난 연남동 연남지하보도.
“전 제 동생을 그리겠습니다….”
그림 그리기 수업(드로잉 아카데미)에 참여한 장병우 씨(64)가 지갑을 꺼냈다. “생각나는 물건이나 소지품을 그려보라”는 강사의 말에 그는 지갑 속 동생의 사진을 도화지 위에 올렸다. 그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의 오빠다. 장 교수가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교수가 되는 동안 장 씨는 LG오티스 사장을 지낸 경영인으로 살아왔다.
마포구 연남동에 21년 동안 살면서 자신의 일상을 그린 것은 처음이었다. 동생 그림 외에도 그는 전선줄이 늘어진 골목길, 꼬부랑 동네 할머니 등을 ‘일기’ 쓰듯 담아냈다. 그림 한 번 제대로 그려본 적 없지만 ‘연남동 화가’가 된 장 씨. ‘기사식당’ 동네였던 마포구 연남동은 하루하루 그렇게 예술마을로 변해가고 있다.
○ ‘제2의 홍대 앞’을 꿈꾸는 연남동
1975년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분리된 연남동은 벚나무 감나무 등이 많은 전형적인 주택가였다. 택시기사들이 자주 드나들며 밥을 먹는다 해서 ‘기사식당’이 많은 동네로 알려질 뿐 서교동 상수동 합정동 등 이른바 ‘홍대 앞’ 문화로 대표되는 이웃 동네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림으로 치면 ‘무채색’과도 같은 이곳에 최근 홍익대 앞에서 활동하던 예술가가가 하나둘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 사진 왼쪽이 고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의 오빠 장병우 씨. 사진 제공 마포구. 9년째 홍익대 앞에서 예술시장 ‘프리마켓’을 운영하는 ‘일상예술창작센터’가 대표적이다. 이 단체는 올해 초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인 연남동에서 ‘새로운 예술’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 연남동주민센터에서 동네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가꾸는 ‘연남 올레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고 곧바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아카데미를 열었다. 밥그릇 빚는 도자기 수업부터 동네 모습 찍는 사진 수업, 일상을 담는 그림 수업까지. 소재는 모두 ‘연남동 속 자신’이었다. 70명의 수강생은 첫 결과물을 연남지하보도에서 이뤘다.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을 타일에 담아 어두컴컴한 굴다리 입구를 화사하게 바꾼 것.
○ 세탁소 아저씨도 ‘예술’을 논하다
오래된 세탁소 앞 새로 생긴 갤러리, 재래시장 옆 조용한 북카페…. 굳이 주민들과 특별한 공공미술을 하지 않아도 연남동 곳곳에는 이미 ‘예술’이 녹아 있다. 그 중 최근 들어선 예술공간 ‘플레이스 막’은 신기하다 못해 뜬금없어 보인다. 현재 이곳에는 행위예술제인 ‘2010 서울 똥꼬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어지럽게 놓인 생수병, 깎다 만 연필…. 유기태 플레이스 막 대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바로 앞 세탁소 주인아저씨가 이해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이곳을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와 “밥 먹었어?” “이번 작품 뭐지?”라는 질문을 서슴없이 던졌다.
유 대표는 “홍익대 앞, 청담동, 인사동 같은 ‘뻔한 곳’이 아니라 사람 냄새나는 예술 불모지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갤러리 앞 ‘세탁소 아저씨의 가죽 재킷 오래 입는 법’, ‘연남 돼지갈비집 주인아저씨의 양념 만들기’ 등을 내년 갤러리 예술제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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