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9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유영선 양(16·경기 시흥시)이 플루트로 ‘사랑의 인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영선이의 숨은 재능이 발견된 것은 지난해 5월 아동정서발달서비스를 받으면서부터다. 1년이 되지 않아 시흥시 예능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우승이라는 거, 1등이라는 거 처음 해봤어요. 너무 얼떨떨했고…너무 기뻤어요.” 그날을 회상하는 영선이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영선이가 초등학교 5학년 크리스마스이브, 2년간 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집안은 급속히 기울었고 영선이는 배우던 플루트를 그만둬야 했다. 영선이는 “매일 슬픈 건 아니었다”면서도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면서 지냈다”고 말했다. 》
“플루트는 나의 희망” 지난달 19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음악스튜디오에서 이재환 단장과 유영선 양이 플루트 교습을 하고 있다. 이 단장은 “내게 음악이 기회였듯이 지금 배우는 아이들에게도 기회가 될 것이다.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밥이 아니라 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으러 집에서 서초구 양재동까지 왕복 2시간 거리를 오간다. 일하는 엄마가 돌아오시기 전에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게 없었는데 공부도, 음악도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도 가야 하니까요. 아이들에게 플루트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 현금지원만으론 ‘복지’ 한계
기존의 ‘복지’는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쳐왔다. 생계를 보전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면서 획일적인 현금 지원 복지만으로는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는 데 한계에 부닥쳤다. 특히 가난의 대물림을 막으려면 교육 문화 같은 사회서비스로 인적자본 형성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영선이가 지원받은 ‘아동정서발달 서비스’는 가구평균소득 100% 이하 가정의 만 8∼13세 아동이 본인부담금 1만∼2만 원만 내고 악기 레슨이나 음악치료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매달 2240명이 혜택을 받고 있다. 영선이를 가르쳤던 이재환 밀레니엄 오케스트라 단장(43)은 “영선이가 성취감을 느끼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에 주눅 들어 기운 없어 보이던 표정이 사라졌다”며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고 1년 정도 지나면 놀라운 변화를 보인다”고 말했다.
이 단장은 이들이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지체장애아나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쳐 오다가 2년 전부터 보건복지부 사회서비스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음악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이 단장 역시 충남 공주시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밴드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음악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밴드에 들어가 호른을 배우기 시작했고 서울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도 생겼다. 이 단장은 “호른을 잡기 전에는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며 “아이들에게는 밥만이 아니라 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단장은 예산상 한 사람이 최대 2년까지만 받을 수 있는 ‘아동정서발달서비스’ 기간이 끝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인천 계양구를 비롯해 8개 오케스트라가 출범했다. 한 달에 한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데 적어도 100만 원 이상 들지만 그만둘 수 없다. 이 단장은 “상처를 치유한 아이들은 이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모자며 목도리며 장갑을 뜨개질을 해 인근 양로원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강신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의 ‘사회적 이동성의 현황과 과제’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계층 상승을 경험한 빈곤층이 1990∼1997년 43.6%에서 2003∼2008년 31.1%로 줄어든 반면 빈곤층으로 떨어진 중하층은 같은 비교 대상 기간에 12%에서 17.6%로 늘어났다. 아버지의 소득과 자녀 소득의 관계에서 ‘교육’이 41%로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최근 소득 격차로 인해 교육격차뿐 아니라 문화격차도 벌어지고 있다. 2003년, 2006년, 2008년에 실시된 문화향수 실태조사를 보면 영화 공연 같은 문화행사 관람 경험이 62.4%에서 67.3%까지 증가했지만 월소득 100만 원 미만 집단은 예외였다. 2003년 25.3%에서 2008년 19.3%로 오히려 감소했다. 월평균 가구소득이 100만 원 미만인 경우 문화비를 전혀 지출하지 않는 비중이 81.8%에 달하지만 100만 원을 넘어서면 그 비율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평균 가구소득 100만 원 미만인 저소득층의 월평균 문화비는 6324원 이하로 301만 원 이상 5만8296원의 9분의 1수준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국가로 평가받아 왔으나 최근 계층이 공고화되는 현상은 교육·문화 격차가 벌어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예체능 학원에 보내주는 ‘예술로 희망드림’ 사업을 하고 있는 서울시복지재단 송성숙 사업지원부장은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경쟁력을 키워주는 것”이라며 “사회에 진출했을 때 ‘인사이더’로 살아가려면 문화·교육자본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현금 급여를 줄이고 현물급여, 사회서비스를 늘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200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현금 급여의 비중은 공공사회지출 대비 1% 수준인데 우리나라는 8%에 달한다. 이태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현금 급여는 복지의존성을 높이고 자립기반을 마련해 줄 수 없다. 생계지원 같은 현금 지급보다 주거 의료 같은 현물 급여와 교육 문화 사회서비스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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