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반 5등 안팎인 중2 강모 군(14·서울 강서구)은 평소 말수가 적다. 쉬는 시간 친구들이 교과서를 들고 찾아와 모르는 부분을 물어봐도 “잘 몰라”라고 퉁명스럽게 답하기 일쑤. 선생님이 수업 중 “칠판 앞으로 나와 문제를 풀어보라”고 할 때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이런 소극적인 성격 탓에 일부 친구들에겐 ‘공부 좀 한다고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최근 한 달 새 강 군은 같은 반 여학생 3명으로부터 ‘대시’를 받았다. 일주일 전부턴 짝사랑하던 같은 반 여학생과 사귀기 시작했다. 강 군의 인기가 급작스럽게 상승한 이유는 뭘까? 바로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의 준말)과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의 준말)이 중학생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이 평소와 똑같은 저의 행동을 ‘공부도 잘하면서 쿨(cool)하다, 시크(chic)하다’며 달리 보더라고요. TV 드라마에 깔끔하고 잘생긴 남자배우가 말수도 적고 건방진 인물을 멋지게 연기한 덕에 오해도 풀고 여자친구도 생긴 셈이죠.”(강 군) 차도남, 까도남 열풍이 중학생들 사이에도 불고 있다. 과거엔 여학생들 사이에서 수많은 개인기와 뛰어난 유머감각을 갖춘 남학생이 인기였던 반면, 최근엔 TV 드라마에 나오는 소위 ‘싸가지’ 없고 무뚝뚝한 남자주인공과 비슷한 모습의 남학생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 이런 이유로 최근 남학생들은 차도남, 까도남을 흉내 내면서 배꼽 잡을 해프닝을 양산하기도 한다.
까도남이 되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은 TV 드라마 속 주인공의 대사와 말투를 따라하는 것.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SBS 주말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젊은 백화점 재벌 김주원 역(현빈)이 학생들의 대표적 롤 모델이다. 드라마 속 대사를 패러디해 체육복을 빌리러 온 친구에게 “조심해서 입어. 이태리 문방구 주인이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만든 옷이야”라고 말해 웃음을 주기도 하고, 과제를 빌려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정색하며 “이게 최선이야? 확실해?”라고 쏘아붙이기도 한다.
중3 양모 군(15·서울 양천구)은 얼마 전 TV 드라마 대사를 인용해 평소 좋아하던 같은 반 김모 양(15)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양 군은 주말에 본 드라마 속 현빈을 떠올리며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김○○ 씨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예뻤나? 작년부터?”라고 말했다. 김 양의 반응은?
“김○○도 드라마 속 길라임 역(하지원)처럼 절 똑바로 바라보며 ‘꺼져’라고 말하더라고요. 드라마를 패러디해 고백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기 좋게 거절당한 거죠.”(양 군)
차도남이 되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은 가능한 한 침묵을 지키는 것. 친구들이 말을 걸어도 단답형으로 답하는 건 기본. 냉소적으로 보이기 위해 농담에도 웃음을 참으며 한쪽 입꼬리만 올려 최대한 가볍게 웃는다.
평소 별명이 ‘모태 산만’(태어날 때부터 산만했다는 의미)일 정도로 말이 많던 중2 정모 군(14·경기 안양시). 그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1학년 후배 이모 양(13)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도남 되기 작전에 돌입했다. 점심시간마다 이 양의 교실을 찾아가 음료수를 건네며 “자, 그냥 마셔”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양이 “고맙다”며 웃어보여도 무심한 척 “됐어”라고만 답했다. 작전 시행 약 한 달 후 정 군은 이 양과 사귀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과 1주일 만에 차이고 말았다.
“우연히 제가 교실 앞에 나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벼워 보이는 사람은 싫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친구들에게 ‘차인 도시 남자’란 의미에서 차도남이라고 불리게 됐어요.”(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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