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년 전 자동차 사고로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17세의 어린 나이에 유산이란 것을 물려받았다. 유산은 다름이 아닌 지방 유선방송사업체였다. 필자가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필자는 당시 미성년자였고 부친의 권유로 유학 중이었다. 유산 관리는 어머니와 누님들께 맡기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마쳤다. 안타깝게도 학비 지출과 유학기간의 여러 가지 사건사고로 유산의 규모가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국제적인 경험과 학위라는 또 다른 자산을 얻어 환경 분야 전문가로 잘 생활하고 있다.
필자가 오랜만에 ‘유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에 한국을 방문한 영국 카본트러스트사의 데이비드 빈센트 박사 때문이다. 기업의 온실가스 저감과 관련한 연구를 지원하는 전문기관인 카본트러스트의 창립멤버인 빈센트 박사는 방문하는 곳마다 유리창과 건물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는 “한국의 거의 모든 건물, 특히 신축된 고층건물들이 한국의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이 되는 ‘유산’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위용을 자랑했던 63빌딩을 소개할 때 전력소모량이 경기 의정부시 전체의 전력소모량과 같다는 통계자료를 인용한 것처럼 고층건물은 막대한 전력과 연료를 사용한다. 냉방에 필요한 전력 생산 비용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고 난방을 위해 필요한 연료 비용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와 열섬현상의 심화로 냉방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고층건물을 인간이 사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현대인들은 죽어서 건물을 남긴다. 영국에서는 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건물의 에너지 사용량 저감을 유도하기 위해 각 건물의 에너지 등급을 조사하고 부동산 거래 시 에너지 등급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등기부 등본에 연간 에너지 사용량 등의 정보를 기재해 건물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건물의 관리비용에 신경을 쓰도록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건축가는 건물 외관과 미적 요소를 우선으로 설계하고 시공사는 시공비용 감축만 신경 쓰고 건물주는 임대수익만 생각하게 만드는 현재 시스템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공사가 설계와 건물의 장기적인 관리까지 책임지는 새로운 시스템을 시험 중이다.
유산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관리가 어려운 유산은 큰 부담이 된다. 우리는 이미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대변화라는 파괴적인 유산을 만들어내 후세대에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한 ‘건물’이라는 또 다른 악성 유산을 남기지 않도록 개선의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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