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법관의 전형은 명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임관한 엘리트다. 시대가 바뀌며 법관의 출신학교와 전공이 다양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현직 법관의 절반 이상은 서울대 출신이다.
그러나 최근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은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성균관대 야간대학을 나와 33세에 늦깎이로 임관한 서울중앙지법 황적화 부장판사(55·사법시험 27회)를 ‘최고 법관’으로 꼽았다.
변호사들은 2010년의 우수 법관으로 15명을 선정했는데 황 부장판사는 유일하게 3년 연속 우수 법관의 기록을 세웠다. 법원 내에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이력만 보면 의외의 일로 볼 수 있다. ○ 강자에겐 엄격하게, 약자에겐 관대하게
왜 변호사들은 황 부장판사를 계속해서 우수 법관으로 꼽았을까. 이들이 쓴 법관 평가서에는 “당사자에게 재판 진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구하고 증거를 채택할 때도 심사숙고한다”(A 변호사), “궁금한 점이나 부족한 점도 충분히 심리해 당사자들의 불만이 없다”(B 변호사)고 적혀 있었다.
황 부장판사가 재판장이었던 소송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으면 재판장도 마음이 급해 대리인이나 당사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끊기 마련인데 황 부장판사는 늘 양쪽의 말을 충분히 들어줬다”고 기억했다. 그는 “한번은 소송 당사자와 함께 법정에 간 적이 있는데 당사자가 ‘저 재판장님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들어주신 것 같아 참 다행이다’라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특히 황 부장판사는 돈이 없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직접 소송에 임하는 당사자나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신출내기 변호사들이 법정에 나올 때에는 법리나 소송 절차를 몰라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청’과 ‘배려’, 이것이 그의 재판 진행 핵심코드인 셈이다.
그의 판결 성향은 어떨까. 2004년 12월 군산지원장으로 있을 때 그는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여당 국회의원에게 검찰이 300만 원을 구형했지만, 그 3배가 넘는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하는 등 정치인과 공직자들에겐 가혹하리만치 엄한 형을 내렸다.
그가 2008년 10월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털어놓은 또 다른 일화.
“가난한 집안의 어떤 소년이 술에 취해 사는 아버지에게 항의하며 다투던 중 뜻밖에 아버지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소년 피고인이 법정에서 오열하며 장시간 최후진술을 했다. 죄에 대한 벌을 면할 수는 없겠으나, 그 삶이 슬프지 아니한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멍에를 짊어진 채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피고인의 정상이 너무나 안쓰러워 필자의 목울대가 아파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나의 사표(師表)는 김홍섭 판사”
우수 법관 선정 이후 그는 언론의 잇따른 인터뷰 요청을 피해 왔다. 19일 오전 어렵게 그를 사무실에서 10분가량 만날 수 있었다. 무작정 질문부터 던졌다.
―이번 법관 평가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기자분들한테 전화가 여러 통 왔는데 안 받았습니다. 그 발표 때문에 참 난감하게 됐습니다. 다른 훌륭한 판사님들도 많은데…그분들에게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다른 판사들이 훌륭하신 분이니 꼭 인터뷰하라고 추천하던데요.
“정말 죄송하지만 법관이 인터뷰하는 건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과거에 은행에 근무하다 판사가 됐는데….
“어릴 때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서 상고를 나왔습니다. 당시엔 상고생들이 은행에 취업하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운이 좋아서 합격했는데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야간대학을 가서 사법시험을 쳤습니다. 그때 은행에서 배운 것들이 재판할 때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의 부모는 황해도에서 부산으로 피란 와 1956년 그를 낳았다.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인술을 펴다 일찍 돌아가셨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그는 추가 질문을 정중히 사양하면서 그 대신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2005∼2007년) 법조인의 길을 막 나서려는 연수원생들을 위해 연수원 소식지인 ‘미네르바’에 썼던 글을 건네줬다.
“김홍섭 판사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재소자에게 종교서적을 사다 주는 휴머니스트,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법철학자였다. 여러분도 위대한 법관이자 법철학자가 남긴 고결한 삶의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넣고 보석 같은 영감을 건져 올렸으면 좋겠다. 훌륭한 선배들이 깨끗한 양심을 지키고 청죽(靑竹) 같은 소신을 묵묵히 실천해 왔고 후배들을 위해 오늘날의 터전을 닦아 놓았음을 잊지 말길 바란다.”
―요즘엔 그같이 청빈한 법관은 드물지 않나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법원에 김홍섭 판사와 같은 훌륭한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저도 그분처럼 ‘성자(聖者) 법관’의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판사”
동료 법조인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고교 1년 후배이자 한국은행에 함께 근무하다 법조계에 입문한 박충근 변호사는 “업무에는 한없이 엄격하지만 약자를 배려하는 인간미 넘치는 법관”이라고 평가했다. 박 변호사는 “황 부장판사는 경기 군포시의 3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버스로 출퇴근할 정도로 모든 생활이 검소하다”며 “무슨 청탁이라도 있을까 봐 고교 동문은 물론이고 외부인을 일절 만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재경 지법의 한 판사는 “공정과 청빈을 신념으로 ‘선비정신’을 재판에서 구현하는 판사”라며 “법원이 엘리트 집단으로, 일반인들과 괴리가 크다는 인식이 퍼진 상황에서 그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법원으로서도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 제자인 정병선 변호사는 “딱딱한 법리를 자신이 직접 겪은 다양한 사회 경험을 배경 삼아 쉽게 설명해 주셨다”며 “제자들에게도 높임말을 쓸 정도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늘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인품은 큰 배움이 됐다”고 기억했다.
황적화 부장판사가 존경하는 법관으로 꼽은 고 김홍섭 판사(1915∼1965·사진)는 생전에 ‘사도법관(使徒法官)’으로 불렸다. 공정한 법집행에 대한 올곧은 신념과 청빈한 생활을 끝까지 지켰던 김 판사는 지금도 법학도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191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니혼(日本)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나중에 초대 대법원장이 된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과 함께 변호사로 활동했다. 광복 후 서울지검 검사로 일하다 서울지법 판사로 재부임해 1960년 대법원 판사를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자신이 판결한 사형수들의 대부(代父)를 자임하고 유가족들을 돌봐 ‘법복을 입은 성직자’로 통했다. 서울고법원장을 끝으로 법복을 벗고 1965년 폐암으로 별세하자 그의 영정사진 밑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사형수 10여 명의 사진이 함께 놓이기도 했다.
김 판사는 늘 흰 고무신을 신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다. 점심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1959년 전주지방법원장에 임명됐을 때도 이런 차림으로 취임식장에 가려 하자 지인들이 외투를 사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처가에서 보내준 쌀조차 되돌려 보낼 정도로 그의 삶은 청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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