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세상을 떠난 박완서 씨는 우리 나이 마흔에 늦깎이로 데뷔했음에도 끊임없는 자기갱신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된 작가였다. 팔순을 앞둔 지난해에는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어서 행복하다”면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발표해 글쓰기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보였다. “글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는 작가는 글쓰기가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밝히곤 했다.
1931년 개성 외곽 지역인 경기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서울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그해의 나이인 스무 살에 영혼의 성장이 멈췄다”는 그는 1·4후퇴 당시의 혹독한 추위를 잊을 수 없었다면서, 그 비극의 시대를 글로 증언하겠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1953년 직장 동료 호영진 씨와 결혼한 뒤 살림에 묻혀 살던 그가 1970년 등단작으로 내놓은 장편 ‘나목(裸木)’은 그 첫 증언이었다. 이후 ‘엄마의 말뚝’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의 작품에서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나아가 그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고도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새롭게 등장한 가족관계 및 소시민 의식의 변화 등을 아우르면서 예민한 시대감각을 작품에 투영했다.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비판하면서 순수한 인간 본성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옹호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의 작품에서는 남성 중심주의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렸다.
평론가 황도경 씨는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일그러진 개개인들의 삶의 초상, 도시문명 사회의 불모성과 그 안에서의 허위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삶의 양태, 권태롭고 무기력한 소시민의 일상, 억눌린 여성 현실, 죽음과의 대면과 극복 등 그녀의 문학이 담아낸 세계는 실로 놀랄 만큼 다양하다”고 평했다.
언어의 조탁도 탁월했으며 초기에 비해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특히 원숙하고 여유로운 문장의 힘이 돋보였다. ‘엄마의 말뚝2’가 이상문학상을 받을 당시 심사위원들은 “유려한 문체와 빈틈없는 언어 구사가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라고 평가했다.
등단은 늦었지만 작품 활동은 왕성해 그의 작품이 실린 책은 청소년용을 포함해 200여 권을 헤아린다.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소설집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친절한 복희씨’ 등을 펴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같은 동화집도 발표했다. 동화 ‘옥상의 민들레꽃’,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등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독자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으며 여러 편이 TV 드라마로 옮겨졌다. ‘한 말씀만 하소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등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감싸는 산문집도 펴냈다.
2007년 개성 관광의 길이 열렸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형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진짜 나의 고향 땅을 밟고 싶은 것”이라는 바람에서 단호하고도 철저했던 작가의 성품을 헤아릴 수 있다. 그의 작품 또한 그러했다.
1988년 남편을 암으로,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뒤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듭해 왔다는 그는 지인들에게 “죽는 것이 무섭지 않다. 아들과 남편을 만날 생각을 하면”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 오랫동안 그리던 이들을 만나게 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