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SCHOOL DIARY]우리는 그들을 ‘종결자‘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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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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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수학만 90점 이상··· 삼국∼조선시대 왕 모조리 암기···
수업시간에도 간식··· 1∼6교시 내내 취침···


《서울의 한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고모 군(17·서울 은평구). 그는 지난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점심시간이면 반 친구 10∼15명이 모여 작은 ‘대회’를 열었다. 종목도 다양했다. 팔씨름이나 레슬링, 씨름처럼 남학생들이 즐기는 힘겨루기 게임은 물론, ‘스도쿠(숫자 퍼즐) 빠른 시간 내에 풀기’처럼 두뇌를 겨루는 게임까지…. 경쟁은 치열했다. 팔씨름 대회 결승전이 열리던 날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아 7교시 후 쉬는 시간까지 경기가 계속됐을 정도. 도대체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이 무엇이기에…. 다음은 고 군의 설명. “우승상품은 없어요. 대신 우승자는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해당 종목의 ‘○반 공식 ○○ 종결자’라 지칭됐죠. 그게 뭐 대단한 거냐고요? ‘종결자’가 되는 순간 ‘반에서 팔씨름을 가장 잘 하는 아이’처럼 뚜렷한 캐릭터가 생겨 모두에게 주목받게 되거든요. 학급뿐 아니라 전교적인 ‘스타’가 되는 셈이에요.”》‘종결자’. 특정 분야나 주제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만큼 월등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하는 단어. 그러나 요즘 신세대들은 이를 해당부분의 ‘달인’의 의미로 재해석해 지난해 말부터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시키고 있다.

종결자라는 유행어는 한 온라인 게임에서 ‘모든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낚싯대 아이템’을 종결자라 부르면서 퍼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에 따라 최근 히트곡 ‘좋은날’을 부르며 ‘3단 고음’으로 일컬어지는 매우 높은 음역의 목소리를 과시한 여고생 가수 아이유에게는 ‘고음 종결자’란 별명이, 미모의 어린시절 사진이 화제가 된 탤런트 김혜수에겐 ‘자연미인 종결자’라는 별명이 생겼다.

종결자 열풍은 중고교를 아예 점령해버렸다. 중고생들은 친구들의 특징을 바탕으로 매일 새로운 종결자를 양산해 낸다. 수행평가 때마다 형형색색의 표지와 방대한 사진자료로 무장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여학생은 ‘수행평가 종결자’라 불리고, 중간·기말고사 평균점수가 80점대를 넘어본 적이 없지만 유독 수학은 단 한 번도 90점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남학생은 ‘수학 종결자’로 불린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부임했던 왕의 이름과 순서를 모조리 외우는 여학생에겐 ‘국사 왕 종결자’란 별칭이 붙여지기도 한다.

그럼 종결자는 모두 긍정적 의미일까? 다소 불명예스러운 종결자도 있다. 거무접접한 피부색에 주름이 많아 도무지 고교생이 아닌 듯한 외모를 가진 남학생은 ‘노안 종결자’로 불리고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은 물론 수업시간까지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군것질을 하는 남학생은 ‘식탐 종결자’로 불린다.

평소 잠이 많기로 소문난 고1 박모 양(17·서울 서대문구)는 ‘수면 종결자’다. 그가 이런 불명예스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 어느 날의 1교시 수학수업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학담당인 담임선생님의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박 양은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해 책상위로 엎어졌다. ‘5분만 살짝 졸아야지’란 생각에 눈을 감았건만, 시간은 빛처럼 흘러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잠에서 깼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아차, 너무 오래 졸았구나’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은 2교시 국어선생님이 아니라 방금 전에 본 담임선생님이 아니겠는가. 박 양이 옆 친구에게 “2교시는 자습이야?”라고 묻자 주변 친구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어리둥절하다가 문득 시계를 바라보니 오후 2시 반이더라고요. 점심도 먹지 못하고 6교시 수학수업 시작 전까지 쭉 잔거죠. 담임선생님도 친구들이 웃는 이유를 들으시더니 황당하다는 듯 웃기만하더라고요.”(박 양)

이 사건 이후 박 양은 친구뿐 아니라 교사들 사이에서도 수면 종결자로 불리게 됐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 종결자가 되기도 한다. 서울의 한 여고에 다니는 2학년 김모 양(18·서울 광진구)은 학교에서 ‘사회교과서 종결자’로 불린다. 반 30명 중 15등 안팎의 성적인 김 양이 유독 사회에선 높은 성적을 받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가 이런 별명을 얻게 된 건 교과서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바퀴벌레 때문이다.

지난해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둔 사회수업시간.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다 지난 수업 때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는 시험에 나올만한 부분을 알려주겠다”고 공언한 까닭에 교실분위기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수업시작 20분 후, 교실 맨 뒷자리에 앉은 한 여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책상위로 뛰어 올라갔다.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 한 쌍이 출현한 것. 바퀴벌레는 빠른 속도로 교실을 헤집고 다녔고 교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 양. 책상위에 있던 사회교과서를 바퀴벌레를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귀신같은 솜씨로 바퀴벌레 한 쌍을 일소한 김 양.

“이날 수업에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힌트만 콕 집어 공부할 요량으로 사회공부는 하나도 안했거든요. 이렇게 중요한 수업시간을 바퀴벌레 때문에 망칠 순 없잖아요? 급한 마음에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는데 그게 사회교과서였지 뭐예요.”

바퀴벌레 사건은 전교에 퍼졌고 김 양은 ‘영웅 아닌 영웅’이 됐다. 그에게 “벌레를 잡아 달라”며 사회교과서를 들고 오는 친구들도 생겼다. 김 양은 “간혹 ‘바퀴벌레 종결자’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는 친구도 있다”면서 “비록 사회시험은 망쳤지만 고3땐 열심히 공부해 진정한 사회교과서의 종결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s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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