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안 떠나고 싶었겠어요. 내 고향이니까 또 소방공무원이란 사명감 때문에 남았던 거죠"
지난해 11월23일 북한의 포격으로 연평도에 난 화재를 맨처음 진압한 뒤 지금까지 섬을 지키고 있는 연평119지역대 신효근(39) 소방사.
신 소방사는 연평도가 포격을 당하던 날, 지역대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밖에서 포 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소리가 좀 달랐어요. 우리 군이 포 사격 훈련을 하면 주민 신고가 들어올까 봐 우리 쪽으로 미리 연락이 오는데 그날은 그런 게 없었어요."
약 200m 떨어진 마을 앞으로 차를 타고 나가봤더니 포탄 여러 발이 곧장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사방에 퍼졌다. '북한'이란 단어가 머리에 퍼뜩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119'로 전화를 걸어 '연평도에 북한이 쏜 포가 떨어지고 있습니다'고 알리고는 바로 기능직 공무원 이성원(41)씨와 화재 진압에 나섰다.
당시 지역대에 있던 차량은 한번에 물 2600¤를 실을 수 있는 펌프차 1대가 유일했다.
신 소방사는 이 씨와 민간인 의용소방대원 6명과 함께 펌프차를 타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을 껐다. 펌프차에 실은 물이 금세 바닥나 마을과 지역대 사무실을 10번 넘게 오가야 했다. 밤에는 먹을 게 없어 정전으로 캄캄해진 관사 내부를 뒤져 찾은 라면을 부숴 먹었다.
화재가 난 주택 10여 채는 당일 오후 10시 경 겨우 불길이 잡혔다. 그 뒤로도 "산불이 충민회관 뒤편으로 내려오고 있어요" "발전소가 위험해요" 등의 신고가 계속됐다. 신 소방사 일행은 다음날 오전 4시 인천에서 인력 80여명과 장비 23대가 연평도에 도착할 때까지 진화 작전을 계속했다. 그날 오후 4시 불은 완전 진압됐다.
신 소방사는 화재를 진압하는 동안 연평도 보건소에 근무하던 부인과 세 아들이 피란길에 오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했다.
"나중에 동료 직원으로부터 아내와 아이들이 밤새 대피소에 있다가 아침 9시쯤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죠. 기지국이 파손돼 휴대전화 통화가 두절되기도 했지만 가족들 생각할 겨를이 없더라고요. 불 끄는 게 더 급했죠" 연평도에서 태어난 신 소방사는 1998년 기능직 공무원으로 시작해 2009년 정식 소방관이 됐다. 연평도에서 지금까지 14년째 근무 중이다.
그동안 '이렇게 큰 불은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지난 1월 포격 화재 초기 진압에 나선 공로를 인정받아 인천 중부소방서에서 '으뜸소방관'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연평도 상황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포격으로 인한 화재 상황은 종료됐지만 연평도를 떠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구급차를 이용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과 장애인들이 피란길에 나서는 것을 도왔고 이달 초부터 주민들이 속속 돌아오기 시작하자 5천500¤ 물차를 타고 다니며 급수 지원을 하느라 바쁘다.
"주민들이 돌아오면 일은 늘어나겠지만 제 힘을 보태 연평도가 하루 빨리 재건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고향을 지키는 주민이자 연평도에 근무하는 소방공무원으로서 이곳에 안정된 직장이 많이 생겨 저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남아있는 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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