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을 감았다. 서울 신도림고 3학년 배기영 군(18) 눈앞에 중국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의 모습이 펼쳐졌다. 배 군은 상상 속에서 30대 후반의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입국심사대를 지나 공항출구로 나가자 중국현지 직원이 그를 맞았다. 사업보고를 받고 현지공장을 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순간 방황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감정이 북받쳤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내가 꿈을 이루다니….’ 배 군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때였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귓가를 울렸다. 그는 감았던 두 눈을 뜨고 공부를 시작했다. “꿈을 찾은 뒤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제 모습을 상상했어요. 다시 기운이 샘솟았죠.”》 ○ 3년의 방황, 책 속에서 길을 찾다
가, 가 그리고 또 가. 배 군의 중학교 성적표에 새겨진 성취도는 예체능 과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였다. 그는 중1 겨울방학 때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시험시간에는 5분 만에 같은 번호로 답을 찍고 엎드려 자기 일쑤였다. 머릿속은 친구들과 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른바 ‘아차산 패밀리’로 통하는 9명의 친구와 PC방, 당구장 등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새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낮에는 학교를 빠지고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쯤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일부러 비뚤어지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고1 때까지는 그냥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어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죠. 무엇 때문에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던 배 군에게 나침반이 되어준 사람은 어머니 안경숙 씨(43)였다. 안 씨는 배 군에게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꿈을 찾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먼저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고 배 군에게 권했다. ‘꿈꾸는 다락방’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조혜련의 미래일기’ 등의 책이었다. 안 씨는 아들이 꿈과 미래를 주제로 한 특강이 많은 교회수련회에는 용돈을 쥐여주고서라도 꼭 참석하게 했다.
사실 배 군의 삶을 바꾼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꿈에 대한 책을 읽고, 삶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은 ‘꿈꾸는 다락방’.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구절이 마음을 울렸다. 처음으로 ‘나도 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회수련회에서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다윗이나, 요셉 같은 인물의 꿈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구체적 꿈도 책 속에서 찾았다.
“‘워렌 버핏처럼 부자 되고, 반기문처럼 성공하라’를 읽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느낄 수 없던 새로운 떨림이었어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었죠.”
○ “나는 이미 성공한 사람”
배 군은 사업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 워런 버핏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책상 앞에 걸었다. 그때부터 그는 성공한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짬이 날 때마다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고 가정해 자서전을 쓴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당장 눈앞에 목표를 세우고 이걸 넘으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게 아니에요. 이미 ‘성공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공한 나는 과거에 무엇을 했을까 찾았어요. 가장 중요한 게 공부더라고요.”
배 군은 고1 겨울방학때 공부를 시작했다. 의욕은 넘쳤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 특히 수학과 영어는 기초가 없어 수업을 따라가기도 어려웠다. 그는 수학은 초등학교 5학년 계산문제, 영어는 중학교 1학년 문법부터 다시 시작했다.
“솔직히 부끄러웠죠. 방황했던 지난 시간이 후회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바닥까지 내려갔으니까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죠.”
배 군의 공부비결은 명확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절대시간을 늘리는 것. 정규수업이 끝나면 매일 오후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했다. 그날 수업 때 배운 전 과목을 복습하는 데 중점을 뒀다. 교과서에 적은 노트 필기와 수업시간에 받은 자료를 보며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르는 건 그날 바로 해결하고 넘어갔다.
땀은 정직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27점이었던 국어점수는 1년 만인 2학년 2학기 때 83점으로, 40점이던 영어점수는 82점으로 올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계산문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정도로 기초가 없었던 수학실력도 서서히 향상됐다. 이전에는 찍기에 급급했지만 1년 만에 47점을 받았다. 암기과목에서의 성과는 더 뚜렷했다. 세계사는 95점, 중국어는 97점 등 최상위권 성적이 나왔다. 배 군이 가장 좋아하는 명언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는 공부의 시작이 늦어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걱정되지 않는다고. 자신이 확실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싶어요. 성공한 사업가가 돼 사회사업을 펼칠 생각이에요. ‘청소년 비전센터’를 만들어 저처럼 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거예요. 꿈이냐고요? 아니요. 제겐 이미 현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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