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개념과 원리 중심의 교육방송(EBS) 연계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 EBS 교재의 지문을 지나치게 변형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출제해 수험생의 체감 연계율을 높이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EBS 교재에 수록된 문학 작품에 대한 꼼꼼한 이해와 심층 분석의 필요성도 더욱 높아졌다. 한 번 제대로 공부한 문학 작품이 지문으로 나오면 지문 독해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문제 풀이도 훨씬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는 지난 호에 이어 EBS ‘수능특강’ 교재에 실린 작품 중 생소하지만 출제 가능성이 높은 시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오세영의 ‘지상의 양식’이다. 끝없이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하는 숙명적인 한계를 그렸다.
너희들의 비상은/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밭에 뒹구는/낱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모순의 새여. 오세영, ‘지상의 양식’
여기서 주목할 시어는 바로 ‘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꿈, 희망을 표상한다. 순수, 자유, 비상(飛上)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새의 의미는 기존 통념을 뛰어넘는다. 여기서의 새는 숙명적인 모순을 지닌 존재다. ‘은빛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오른 새’라도 낱알 몇 톨을 얻기 위해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비상’은 결국 추락을 위한 것이라는 역설적 인식이 드러난다. 시인은 일방적·맹목적인 진실의 허구성, 자유와 절망의 숙명적인 순환, 존재의 모순을 새에게서 읽는다. 비단 새만의 문제는 아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비상과 추락이라는 대립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간은 그러한 모순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존재다. 이 시에선 이처럼 일상적인 사물이나 현상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 이면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시인의 노력이 담겨 있다.
서정주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도 생소한 작품이다. 이 시는 눈이 내리는 풍경 속에서 눈의 소리를 듣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차분하게 전개한다. 온갖 미물(微物)을 감싸 안 듯 내리는 눈은 연신 ‘괜찮다’를 속삭이며 세상 모든 것을 ‘안고’ 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크고 따뜻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박재삼의 ‘은행잎 감상’도 눈에 띈다. 가난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슬픈 추억을 노래한 시다.
내 열병(熱病)도 가실 겸 지난번 고향길에는 금융조합(金融組合) 뜰에 가 은행잎을 보면서 새 눈물을 배웠네. 은행잎을 줍던 날 밤은 돈을 줍던 꿈으로 홀로 쓸쓸한 소학생(小學生)이었던가. 은행 한 잎을 수신(修身)책에 꽂고서 돈 생각이 나을까 공부 생각이 나을까 나는 선생님 앞에 많은 아이와 함께 은행잎 되어 자꾸자꾸 손을 드는 것이다. 녜, 녜, 녜, 녜, 녜 ……. 황금의 눈물을 가을 땅바닥에 지우며 나는 섰어라. 박재삼, ‘은행잎 감상’
박재삼은 ‘울음이 타는 가을강’ ‘추억에서’ 같은 시에서 서정적인 눈물의 세계를 그렸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고향을 찾은 화자는 금융조합, 즉 은행(銀行) 뜰에서 은행(銀杏)잎을 주우면서 돈이 없어 서러웠던 학창시절을 회상한다. 노란 은행잎을 보며 돈을 떠올리고, 마치 돈을 줍듯이 은행잎을 주웠던 그때 그 시절. 화자의 학창시절은 돈을 벌까 아니면 공부를 할까 고민할 정도로 궁핍했다.
마지막 연의 ‘황금의 눈물’은 다의적 의미를 지녀 눈여겨 봐둘 만하다. 이는 일차적으로 노란 은행잎을 연상시킨다. 또 화자가 소망하는 대상을 뜻하기도 한다. 공부와 돈 사이에서 고민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도 담겨 있다.
황동규의 ‘달밤’도 생소하다. 이 시는 삶의 고독을 우리 자신의 내적 순수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노래했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황동규, ‘달밤’
‘얼은 들판’은 화자가 처한 부정적 현실을 함축한다. 이러한 ‘들판’을 화자는 고독한 모습으로 걷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제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왜일까. 달빛 아래서 걷는 화자의 모습을 ‘그림자’로 표현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자는 ‘달빛’ 때문에 생긴 것. 달빛은 맑고 깨끗한 속성을 지닌다. 즉, 화자는 그러한 달빛을 내면화함으로써 더는 외로운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달빛이 표상하는 밝고 깨끗한 내면이야말로 몇몇 친구에게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결코 ‘외로움이 아닌 길’이다. 오랫동안 화자가 간직해 온 삶의 순수성이다.
비교적 덜 생소하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 않은 작품도 있다. 박두진의 ‘돌의 노래’, 신석정의 ‘대바람 소리’,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 신동엽의 ‘산에 언덕에’가 바로 그것.
박두진의 ‘돌의 노래’는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은 심정을 그렸다. ‘어느 때들 맑은 날만/있었으랴만, 오/여기절정./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하늘 먹고 햇볕 먹고/먼 그 언제/푸른 새로 날고 지고 기다려 산다.’
시에 등장하는 돌은 본래 바닷속에 있었다. 어느 날 바다와 헤어져 혼자 있게 됐다. 돌은 바다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결국 절벽 꼭대기에서 자신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하늘’을 지향한다.
신석정의 ‘대바람 소리’는 세속적 부귀영화를 초월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을 형상화한 시다.
대바람 소리/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 그렇다!/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帝王)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
신석정, ‘대바람 소리’
본문에 언급된 ‘낙지론’은 후한 때 문인인 중장통(仲長統)의 글로, 자연에 귀의한 뜻을 적었다. 시에 나오는 구절은 그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했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춥거나 두려워 몸을 궁상맞게 몹시 웅그릴지언정-’ 세속의 부귀영화는 부러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민하던 화자는 병풍의 ‘낙지론’을 보고 ‘제왕의 문’이 상징하는 부귀영화를 거부한 채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를 음미하는 여유로운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은 시련에 굴하지 않는 생명력과 절망의 극복을 노래했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여름철 폭풍을 이겨낸 백일홍은 화자 자신에 대한 비유다. 화자는 폭풍 속에서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백일홍 나무처럼 자신의 절망도 ‘장난처럼’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고통도 언급하며 깨달음은 고통 없이 순순히 오지 않는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기 위너스터디 언어영역 강사
신동엽의 ‘산에 언덕에’는 그리운 이가 부활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노래했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울고 간 그의 영혼/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이 작품의 시적 화자인 ‘행인(行人)’은 4·19혁명 때 진정한 자유를 외치다 총칼 앞에 쓰러져 간 젊은이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있다. ‘꽃’ ‘바람’ 등의 시어는 ‘고매한 신념과 이상을 가지고, 소리 높여 외치다 죽어간 그리운 그의 환생된 모습’을 표상한다. 그리운 사람이 사라진 쓸쓸한 산과 들을 더듬는 행인의 마음은 어둡고 무겁다. 그는 아마도 헤어날 길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작중 화자는 절망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운 이의 얼굴은 다시 찾을 수 없을지라도, 그 모습은 산에, 언덕에, 들에 화사한 꽃과 맑은 바람으로 남아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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