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그해 처음 문을 열어 아직 교복이 없던 충북 용성중학교 1학년 교실. 범상치 않은 차림새의 한 소년. 형광 노란색 티셔츠에 자주색 스키니 바지를 입었다. 까만 재킷 속에선 호피무늬 안감이 언뜻 내비친다. 왁스를 바른 머리카락은 꾸덕꾸덕하게 서 있다. 다른 학생들은 단연 튀는 그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흘깃 훔쳐만 본다. 그런 급우들을 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머리엔 손도 안 댔네. 저 바지는 엄마가 사준 거 그냥 입었나? 어린애들 같군.’ 올해 3학년이 된 송영훈 군(15)의 이야기다.》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뜻) 인생. 초등 고학년 때가 시작이었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패션은 기본. TV에 나오는 가수들처럼 폼 나는 춤을 추고 싶었던 그는 인터넷에서 춤 동영상을 찾아 동작을 따라하곤 했다. 방학 땐 엄마 아빠 몰래 염색약을 사서 밝은 갈색으로 혼자 염색도 했다.
어울리는 친구들도 남달랐다. 송 군과 함께 무리지어 다니는 대여섯 명의 친구에게 다른 학생들은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소소한 말썽으로 학교에 남아 반성문을 쓰기 일쑤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심 으쓱했다. 왜? 그땐 그게 멋있는 줄 알았다.
○ 폼에 살고 폼에 죽던 송 군, 철들다!
중학교에 입학한 송 군. 초등학교 때처럼 말썽을 피우진 않았지만 멋 내기에 대한 송 군의 관심은 유난했다. 1학년 중반 교복이 생기자마자 바지부터 바짝 줄였을 정도. 매일 3시간씩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남자 코디’를 검색해 유명 연예인의 코디법이나 길거리 패션 사진들을 구경했다. 그간 모은 용돈으로 온라인 의류쇼핑몰에서 쇼핑을 했다. 송 군의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그의 옷장을 보고 “왜 이렇게 옷이 많으냐”며 혀를 내둘렀다.
잘 꾸미고 다녔기 때문일까? 축구를 잘해서였을까? 송 군은 학급 반장으로 뽑힐 정도로 꽤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공부엔 별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 첫 시험 성적은 전교생 약 270명 중 70등대.
겉멋 부리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던 송 군. 그런데 웬일인가. 1학년 후반부터 그의 심정에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요. 고등학생인 누나에게 ‘너처럼 민소매나 와인색 남방 입는 애들은 여자들한테 진짜 인기 없다’는 꾸지람(?)을 계속 들어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 화려한 옷을 입기가 꺼려지는 거예요. 비평준화 지역이라 좋은 고등학교에 가려면 이젠 좀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싶고. 아마 슬슬 철이 들었던가 봐요.”
○ 진짜 폼 나는 친구를 만난 송 군, 달라지다!
송 군이 완전히 바뀐 건 2학년 때 친해진 한 친구 때문이었다.
“제가 반장선거에 나가서 세 표 차로 떨어졌거든요. 이걸 계기로 반장에 당선된 친구와 친해지게 됐는데, 정말 괜찮은 녀석이더라고요. 리더십이 뛰어나서 반 분위기를 잘 이끌고요. 운동도 잘하고 재치도 있고요. 중요한 건 반 1등을 할 만큼 공부도 잘하는 거예요.”
‘저런 애가 진정 폼 나는 애구나’ 싶었다. 덩달아 그도 공부에 욕심이 났다. 자기주도학습이 중요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전 과목 학원을 그만두고 예습·복습을 시작했다. 다음 날 수업에서 배울 부분은 미리 문제를 풀어보고, 쉬는 시간엔 이전 시간에 배운 내용을 다시 읽었다. 선생님 질문에도 꼬박꼬박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2학년 첫 중간고사 전교등수는 53등으로 올랐지만 수학이 문제였다. 다른 과목은 모두 80점 이상이었는데 수학 점수만 56점에 머물렀다. 그는 친구들을 선생님으로 삼았다.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반장인 친구를 포함해 반에서 등수가 높은 친구 서너 명에게 모조리 물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노력은 빛을 발했다. 1학기 기말고사 전교 석차가 30등. 수학성적은 지필고사와 수행평가 점수를 합쳐 81점으로 크게 오른 것. 친구들은 농담 삼아 “무서울 정도다” “공부 좀 그만해라”라며 긴장하는 눈치를 보였다. “걱정 말라. 너희들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받아치면서도 신이 났다.
발동이 걸렸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거의 공부에 매달렸다. 수학 문제집을 반복해 풀고, 영단어도 매일 40개씩 외웠다. 모르는 문제를 알려주던 친구들이 이젠 잘 안 풀리는 문제를 들고 송 군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성적은 승승장구했다.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은 전교 12등. 급기야 수학 100점을 받은 마지막 기말고사에선 전교 1등의 자리에 등극했다.
“기분요? 말도 못하게 좋았죠! 선생님과 친구들도 엄청 놀랐고요. 특히 예전엔 저 때문에 많이 속상하셨을 어머니가 친척들에게 제 자랑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뿌듯했어요.”
송 군의 요즘 옷차림은 수수함 그 자체다. 관심사가 공부에 쏠리다 보니 입는 옷이라고는 교복 아니면 ‘트레이닝복’이다. 머리에도 왁스를 멀리한 지 오래됐다. 친구들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냐”면서 신기해한다.
송 군이 ‘폼’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저버린 걸까? 아니다. 방향이 좀 바뀌었을 뿐이다. 폼 나는 겉모습에서, 폼 나는 인생으로.
“꿈이 생겼어요. 파일럿이요. 시내에서 파일럿 무리와 마주쳤는데, 각진 군복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운동도 공부도 열심히 해서 공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어요. 파일럿 옷을 입은 채 비행기를 조종하며 하늘을 나는 제 모습, 멋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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