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어요.” 지난달 중순 윤상현(가명·35) 씨는 오전 회의 도중 상사가 질책하자 버럭 화를 냈다. 자리를 박차고 문을 나서면서도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 ‘욱’하는 성격 탓에 사람들과 말다툼이 잦았던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뒀다. 윤 씨는 “화내면 5분도 되지 않아 후회가 밀려온다. 성질을 죽여야지 하면서도 잘 안된다. 답답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 ○ 충동의 시대
자살 충동, 도박 충동, 쇼핑 충동, ‘악플’ 충동…. 언제부턴가 ‘충동’이란 단어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됐다. 공존의 장애물이다. 언론에서도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 이야기가 단골 메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조사에 따르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환자는 2005년 2만1695명에서 2009년 5만702명으로 크게 늘었다. 경기도교육청이 지난해 도내 초등학교 신입생 8만96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10%가 넘는 1만212명이 이 장애가 의심된다고 나타났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감정을 자극하는 변수는 늘어나는데 감정을 조절하는 기제가 줄었다. 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충동의 시대’”라고 했다.
본보가 3월 초 서울시민 40명(남녀 20명씩)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나의 충동지수’(0∼10점 기준·점수가 높을수록 더 충동적)와 관련해선 40명 가운데 17명이 ‘6∼8점’이라고 답했다. ‘3∼5점’이 13명으로 2위.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에 대한 걱정을 한다’는 질문엔 ‘그렇다’가 14명, ‘많이 그렇다’도 6명이나 됐다.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히기 전에 닫힘 버튼을 누른다’는 물음엔 16명이 ‘많이 그렇다’, 12명이 ‘그렇다’고 했다. 한 30대 남성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섰는데 누가 뛰어오면 입에서 욕이 맴돈다.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너무 답답하다”고 했다. ‘별다른 일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불안하다’는 질문엔 ‘그렇지 않다’(19명)가 가장 많았지만 ‘약간 그렇다’는 사람도 17명이나 됐다. 회사원 김수현 씨(28)는 “하루에 한두 번씩 가슴이 두근거린다.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일이 걱정돼 불안하다”고 말했다.
‘TV를 볼 때 리모컨으로 자주 채널을 돌린다’는 질문과 관련해선 ‘그렇다’(12명), ‘많이 그렇다’(11명), ‘약간 그렇다’(9명) 순. ‘인터넷 로딩 시간을 기다리는 게 답답하다’에는 ‘약간 그렇다’(15명)가 1위, ‘그렇다’(14명)가 뒤를 이었다.
온라인에서의 충동성과 관련해선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온라인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해 놀랄 때가 있다’는 질문에 ‘많이 그렇다’고 대답한 4명 모두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답한 5명 가운데도 4명이 여성.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성의 경우 감정을 표출할 공간이 남성보다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특히 성격이 내성적인 여성일수록 익명이 보장되는 온라인을 평소 억눌렸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 지나친 충동은 공존도 저해
과거보다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감정 과잉’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충동이 지나치면 정상적인 삶이나 타인과의 공존을 방해한다. 이화영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교수는 “대표적인 현대인의 질병인 우울증도 알고 보면 마음속에 내재된 표출 충동이 반대 방향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특히 자살은 충동의 극단적인 형태”라며 “자살자 가운데 평소 감정 표출이 거친 사람이 많다”고 덧붙였다.
지나친 충동은 사회 공존 역시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 2009년 12월 아버지와 말다툼 도중 격분해 부모를 살해한 아들이나, 지난해 12월 컴퓨터 게임을 하다 길거리로 나와 흉기로 20대 청년을 살해한 박모 씨(23) 등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범죄자들 가운데 충동조절장애(행동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칠 만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다. 범죄 심리 전문가인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최근 꾸준히 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조사하면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이성 기제가 남들보다 약한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 ‘충동장애 극복하려면’ 전문가 조언 ▼ 인스턴트시대 인내심 줄어… ‘화’ 삭이고 감정조절 훈련 필요
“여보, 지난번에 얘기했던 우리 회사 상무 말이야”
“아 맞다, 이번에 수현이 학원 새로 등록했거든.”
“제발 부탁인데 중간에 말 좀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면 안돼?”
주부 박모 씨(47)는 최근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는 일이 늘었다. 싸움의 발단은 항상 비슷하다. 남편은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A 씨에 대해 섭섭함이 든다. A 씨는 남편과의 대화가 싫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먼저 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나곤 한다. 남편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충동적으로 남편이 말하는 도중에 자기 말을 할 때가 적지 않다.
공존 특별취재팀은 최근 20∼50대 성인남녀 10명과 충동조절장애 관련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성별, 직업별, 나이별로 각자 충동을 느낄 때가 달랐다. 회사원들은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충동조절장애를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익명을 요청한 회사원 A 씨(25)는 “하던 일을 미처 못 끝낸 날은 퇴근 후에도 마음이 불안하고 심장이 쿵쾅거려 눈물이 날 때가 있다”며 억지로 잠을 청해도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주영 씨(28) 역시 “일이 밀릴 때 가장 심리적으로 불안하다”고 했다. 직장만 충동조절장애의 원인은 아니다. 취업 준비생들 역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 이모 씨(26)는 시도 때도 없는 충동조절장애로 공격성까지 나타낼 때가 있다. 그는 “담배를 오랫동안 못 피웠을 때, 또는 길거리에 사람이 많아 빠르게 걸어갈 수 없을 때 누군가를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며 “바쁠 때 인터넷이 안 되면 컴퓨터를 집어던지고 싶다는 충동에 손이 떨린다”고 했다.
대전에서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최모 씨(29)는 “얼마 전 어머니와 심하게 다툰 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칼을 꺼내 손등을 긋고 말았다”고 말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취직 준비 중인 이모 씨(24·여)도 최근 스트레스로 소화불량과 피부 트러블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같은 증상은 충동적 소비로 이어진다. “거울을 보다 갑자기 미용실에 가서 머리 스타일을 바꾸거나 옷을 사들여요. 그래도 좋은 기분은 잠시뿐이죠. 예쁘게 꾸미고 나면 스스로가 더 바보같이 느껴져 더 안절부절못할 때가 많아요.”
50대 가장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다.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있는 김모 씨(53·건축업)는 술을 마실 때 충동 장애를 많이 느낀다고 했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기가 짜증이 난다. 속마음과 달리 자신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잦다.
이 같은 10명의 증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상 속 스트레스로 인한 충동조절장애라고 진단을 내렸다. 아무 이유 없이 충동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는 본질적 충동이 아닌 2차 충동이라는 분석이다. 채정호 가톨릭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취업 준비 여대생은 구직 스트레스가 피부나 장 등 신체 각 부분에서 드러남에 따라 충동성이 더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덕현 중앙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역시 “동물 실험을 해봐도 스트레스를 많이, 지속적으로 받을수록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으로 변한다”며 스트레스를 충동성의 가장 큰 이유로 지목했다. 기다리는 문화와는 거리가 먼 현대 사회를 충동성의 이유로 들기도 했다.
공존을 위해선 충동을 조절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참을성을 학습할 기회가 없는 편”이라며 “주변에 24시간 편의점과 온라인 쇼핑몰들이 널려 있는 환경 속에서 인내심을 배울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조용래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등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즉흥적일 때가 많다”며 “어떤 일에서건 스스로 좌절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이상 공격성이 표출되는 경향이 많고 ‘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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