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서 배운 집중력과 나에 대한 솔직함으로 공부 몰입”
조급함 버리고 곱셈·나눗셈부터 차근차근··· 궁금한 건 주위사람에게 질문 또 질문
《충남 서일고 3학년 유세열 군(18)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프로 바둑기사를 꿈꿨다. 그가 바둑을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집중력을 길러 약간 산만했던 태도를 고쳐보겠단 생각에서였다. 유 군은 상대와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수(手) 싸움’을 벌이는 바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매일 오전 7시부터 자정까지 내내 바둑 생각만 했다. 초등 5학년 땐 바둑특기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후 바둑 공부를 위해 충남 서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하지만 유 군은 고1 때 큰 장벽에 부딪혔다. 프로 바둑기사가 되기 위해 치르는 ‘연구생 시합’에서 잇달아 패배한 것이다.고1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치른 대국에서도 유 군은 ‘불계패’(기권패)를 당했다. 6패째.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는 시합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프로바둑기사가 되기엔 내 실력이 모자란 걸까.’ 9년 만에 처음으로 진로 고민에 빠졌다.》 대학입시까지 2년밖에 남지 않은 시간.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바둑기원 원장과 계속된 상담 끝에 고1 여름방학 때, 유 군은 결국 프로 바둑기사가 되기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욕심만으로 바둑을 고집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가 잘하는 걸 하고 싶었어요. 9년 동안 ‘올인’(다 걸기)한 바둑을 그만둔다는 게 조금 아쉽고 한편으론 두려웠지만…. 부모님과 바둑기원 원장님도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충분히 다른 친구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응원해 주셨어요.”
공부를 결심한 그는 다시 충남 서산으로 돌아왔다.
○ 바둑에서 길을 찾다
새로운 도전. 설레는 마음으로 임한 첫 수업에서 유 군은 적잖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업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초등 저학년 때부터 바둑 공부를 하느라 학교보다는 기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탓이다.
“마치 외계공간에 온 기분이었어요. 영어수업 땐 A, B, C처럼 알파벳밖에 읽지 못했죠. 예를 들어 ‘apple’이란 단어가 나와도 어떻게 읽는 건지, 무얼 뜻하는 건지 몰랐어요. 수학수업 땐 더하기, 빼기밖에 할 수 없었어요.”
고1 2학기 중간·기말고사를 모두 치르고 난 뒤 유 군의 성적은 반 35명 중 25등. 국사를 제외하곤 전 과목 6등급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유 군은 또 다시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공부해야 성적을 올릴 수 있을까? 나의 경쟁력은 뭘까?’ 유 군은 바둑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는 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면서 3∼4시간씩 집중하는 게 자연스레 몸에 밴 덕분이었죠.”
기초가 많이 부족했던 유 군은 서점으로 달려가 초등학교, 중학교 참고서를 샀다. 조급해하지 않고 곱셈, 나눗셈부터 차근히 공부했다. 하루라도 빨리 고교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공부시간도 늘렸다. 다른 친구들보다 30∼40분 먼저 등교해 한발 앞서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귀가하면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오전 1시까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은 유 군을 배신하지 않았다. 고2 1학기 중간·기말고사 합산결과 반 35명 중 15등. 특히 수학은 2등급으로 성적이 급상승했다. 윤리와 사상에선 처음으로 90점 이상을 받았다.
○ 솔직함으로 승부하다
유 군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정도의 성적으로는 바둑을 포기한 아쉬움을 달랠 수 없었다”면서 “자신감을 토대로 더욱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고 말했다.
실력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특별한 공부 노하우가 아닌 바로 ‘솔직함’이었다.
“수학에서 ‘근의 공식’이나 중학교 수준의 영어단어, 영문법처럼 기본적인 내용을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공부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주위 사람들에게 책을 들고 찾아가 도움을 청했죠.”
수업시간 중 유 군의 질문은 끊이질 않았다. 많게는 한 시간에 열 번 넘게 손을 들고 질문하기도 했다. 쉬는 시간과 자습시간엔 과목별로 성적이 우수한 친구 몇 명을 자신의 공부 도우미로 삼고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집에 돌아오면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누나에게 수학을 집중적으로 지도받았다.
유 군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고2 2학기 중간·기말고사 성적을 합산한 결과, 처음으로 반 35명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등수가 올랐다. 수학, 문학, 윤리와 사상 등 무려 세 과목에서 2등급을 받았다. 6등급만 찍혀 있던 성적표는 어느새 2∼4등급으로 가득 찼다.
달라진 건 성적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친구들이 쉬는 시간 책을 들고 모르는 내용을 질문해 오기도 했다. “어렵게 쌓은 바둑 실력을 두고, 왜 힘들게 다시 공부를 하느냐”며 안타까워하던 몇몇 선생님들도 “이렇게만 하면 1등도 문제없겠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 군의 꿈은 여전히 바둑판 위에 있다. 경영학을 전공해 과거보다 침체된 바둑 산업을 일으킬 방법을 찾겠다는 것.
“바둑이 얼핏 지루하게 보이지만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거든요. 사람들에게 이런 바둑의 매력을 알리고 싶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솔직하게 공부하면 꿈을 이룰 수 있겠죠(웃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