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광주지역본부의 모 지점 출납 담당자는 2009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17개월 동안 지점 금고에서 여러 차례 현금 총 5100만 원을 몰래 꺼내 썼다. 카드 빚을 갚을 방법이 없자 고객들이 맡긴 돈에 손을 댄 것.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지난해 10월 농협의 다른 지점에선 직원이 80여억 원을 횡령하는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2007년부터 약 3년 6개월간 다른 은행이 발행한 수표나 어음 등을 입금할 때 실제 받은 금액보다 부풀리는 방식으로 수십억 원의 차액을 가로챘다.
22일 농협중앙회 강당에서 열린 ‘2011년 준법감시 담당자 교육’에서는 직원이 고객 돈을 횡령하거나 유용하는 등 농협 내부의 ‘도덕적 해이’와 ‘무신경’을 고발하는 금융사고 사례가 줄줄이 소개됐다. 세계적으로도 금융권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기록될 농협 금융전산망 마비 사고가 있기 전부터 농협의 내부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자인한 셈이다. ○ 내부통제 총체적 부실
농협의 금융사고는 올해 들어서도 잇따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2월 16일 서울지역본부에서는 1억 원짜리 자기앞수표 3장이 변조된 줄도 모르고 3억 원의 현금을 지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A시중은행의 준법감시인은 “우리는 10만 원짜리 가짜 수표를 바꿔줬다가 들통이 날 경우 모든 직원이 볼 수 있는 내부 전산망에 관련 직원의 이름을 올려 ‘징계대상’으로 알리고 있다”며 “억 원 단위 수표라면 더욱 신경을 써서 가짜 여부를 가릴 텐데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같은 달 1일 울산의 한 지점에서는 위조 신분증을 제시한 한 남성에게 계좌를 만들어준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수사 결과 이 남성은 다른 지점을 옮겨 다니며 위조 신분증으로 만든 계좌에서 3억100만 원의 예금을 인출했다. 해당 계좌의 실제 주인은 농협의 VIP 고객인 이모 씨(61)였다.
이날 강당을 가득 채운 농협의 준법감시인과 준법감시 담당자 200여 명은 ‘금융회사로서의 기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해 발생한 금융사고 사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준법감시인은 기업이 관련 법규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회사 내부 임원으로 농협법에 따라 이사회 의결 절차를 거쳐 회장이 임명한다. 준법감시 담당자는 준법감시인이나 단위 조합의 사무소장을 보좌하며 직원의 횡령, 고객의 예금 강탈 등 내부 통제를 맡는 실무자들이다. ○ 내부통제 부적격자에게도 맡겨
문제는 농협이 이렇게 막중한 내부통제 책임을 ‘부적격자’에게도 맡겼다는 점이다. 이날 발표자는 “지난해 금융감독원의 종합검사 때 자격이 없는 사람을 준법감시 담당자로 지정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밝혔다. 농협에선 견책처분을 받은 뒤 1년 미만인 직원, 감봉 이상의 처분을 받은 뒤 2년 미만인 직원, 근무성적 불량자 등은 준법감시 업무를 맡을 수 없다. 준법감시 담당자의 자격 요건에 부합하지 않은 직원이 내부통제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셈이다.
최근 금융전산망 사고와 관련해 정보기술(IT) 업무 처리가 전반적으로 미흡하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농협 관계자는 “IT 업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미흡하고 직원들이 업무별로 전산업무를 처리하는 절차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털어놨다.
금융회사라면 당연히 점검했어야 할 사항을 놓쳤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특히 매일 확인해야 할 시재금(時在金)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지점이 여럿 있었다. 시재금은 은행이 고객 예금 인출에 대비해 지점별로 보유하고 있는 현금이다. 이날 발표자는 “책임자가 필수로 감시하고 확인해야 할 시재금을 확인하는 데 소홀했다”며 “전반적으로 안이한 태도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다른 발표자도 “지점장과 시군지부장 등 사무소장의 업무현황을 들여다본 결과 시재금 검사는 거의 형식적으로 이뤄질 때가 많았다”며 “지난해 군포지점의 경우 20여 명이나 되는 출납 책임자가 있었는데도 시재금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내부통제 업무는 이번 금융전산망 사고로 더욱 차질을 빚는 악순환을 낳았다. 교육을 담당한 한 농협 관계자는 “준법 감시 결과를 등록하지 못한 사람은 현재 전산망 장애로 입력이 안 될 수 있으니 5월 초까지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 전문성 결여가 가장 큰 문제
농협의 내부통제 실패는 전문성 결여, 파벌 문화, 내부 경쟁 부재(不在) 등 3가지 요인이 빚어낸 합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완배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농협 직원들은 농협대학 출신과 비(非)농협대학 출신으로 나뉘어 전문성보다는 파벌에 치중하는 인사(人事)가 많다“고 꼬집었다. 4년제 대학이 아닌 농협대학의 학제나 전문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업경제, 축산경제, 신용 등 농협의 3대 사업부문별로 특성에 맞춘 인재를 키우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농협의 경제사업을 총괄하는 이덕수 농업경제 대표는 경제가 아닌 금융 전문인으로 꼽힌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농협의 신용대표 이사도 조합장 선거로 선출된 ‘금융 비(非)전문가’인 농협중앙회장의 추천과 동의를 얻어 선임된 탓에 아무래도 금융전문성 면에서는 시중은행장보다 취약하다”고 말했다.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특성을 간과하고 순환 보직을 하다 보니 금융사고가 빈발하다는 분석도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경제사업의 영업 담당자들은 재고처리 등의 과정에서 거래처와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 적지 않다”며 “이런 사람들이 신용사업에서 일을 하다 보면 융통성이 ‘나쁜 습관’으로 작용해 금융사고의 개연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차제에 농협 내부의 느슨한 분위기를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농협은 최근 농협법 개정에 따라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해 ‘농협금융지주’ 출범을 추진하고 있지만 내부통제 시스템의 개선 없이는 ‘무늬만 구조개편’에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농협법 개정안은 향후 농협의 구체적인 형태나 운영방식, 지배구조 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커진 측면도 있다”며 “농협과 정부는 이제부터 새로운 농협을 디자인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 준법감시인 ::
기업이 관련 법규를 제대로 지키는지 내부 통제와 위험관리를 담당하는 회사 내부 직원을 말한다. 기업이 법을 위반할 경우 위규사항을 이사회와 금융감독원에 보고해야 한다. 2000년 은행, 증권, 보험 등 모든 금융기관에 준법감시인 설치가 의무화됐다. ‘준법감시 담당자’는 준법감시인을 보좌해 직원의 횡령 등 내부통제 실무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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