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신호가 떨어졌다. 차량에서 대기하던 형사들은 조심스레 마약 거래 현장에 접근했다. 형사들 사이에는 긴 생머리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도 눈에 띄었다. 그의 얼굴에는 담담함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흉기를 들고 거칠게 저항하는 용의자들. 하지만 그는 돌려차기 한 방에 용의자를 제압하고 상황을 종료시켰다.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이 형사. 올해 서울 동국대사범대부속여고 2학년이 된 이수현 양(17)이 꿈꾸는 10년 뒤 모습이다. 이 양은 중학교 때부터 경찰이 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알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 위한 퍼즐조각 하나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 꿈을 잃다 “공부, 왜 해야 되는데?”
이 양은 초등학교 때부터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 좋았다.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학원에 다녔지만 얌전히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땀을 흘릴 때 희열을 느꼈다. 합기도장에 가면 눈이 빛났다. 겨루기 하면 또래 남자아이들도 한 방에 나가떨어지곤 했다.
공부엔 별 흥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6학년 때는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공부할 과목과 시험이 늘어나면서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수학, 영어의 성취도는 대부분 ‘양’ 아니면 ‘가’. ‘수’를 받은 과목은 체육뿐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학원에 갔다. 오후 6시에 시작한 수업은 10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멀뚱멀뚱 앉아 시간만 때우다 돌아오기 일쑤였다. 숙제는 친구들 답을 베껴서 냈다.
“중2 때 어머니께 학원에 안 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어요. 학교에서도 공부를 안 하는데 학원에 가는 건 돈 낭비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부턴 친구들과 어울려 보드게임방, 커피숍 등을 돌아다녔어요. 동영상을 보고 아이돌 그룹 원더걸스의 ‘텔미’ 같은 최신 춤을 연습하고 노래방에 가서 땀을 빼고 돌아오곤 했죠.” ○ 꿈을 찾다 “경찰, 공부 안 해도 되잖아?”
경찰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중3 때. 범죄수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현장수사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복잡한 건 질색이던 이 양은 몸으로 뛰는 경찰이 적성에 꼭 맞는다고 생각했다. 길을 오가며 보는 멋진 제복을 입은 경찰의 모습도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공부에는 여전히 흥미가 없었다. ‘수사관? 몸만 날렵하면 되지 뭐!’
하지만 머지않아 환상은 깨졌다. 학교 선생님 소개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에 다니는 학교 선배를 만나면서다. 이 양은 자신 있게 물었다. “합기도 잘하면 경찰 되는 데 도움 되죠?” 돌아온 선배의 대답은 이 양의 기대와 달랐다.
“선배는 경찰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경찰이 된 뒤로도 끊임없이 공부한다고 말했어요. 학교 진로탐색 시간에 만난 마약전담반 형사님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경찰행정학과에 가고 싶으면 공부에 매진하라고 충고했어요.”
이 양은 자신의 성적을 돌아봤다. 입학 전교등수는 148등. 중위권이었지만 경찰행정학과에 가기는 턱없이 부족한 성적. 특히 중학교 때 공부에 손을 놓아 기초가 부족했다. 고등학교 첫 내신시험 수학점수는 59.5점. 암기과목 성적도 좋지 않았다. 사회는 75.3점, 기술·가정은 69.4점이었다.
○ 꿈을 좇다 “행복, 경찰 되려면 공부해야죠!”
이 양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매일 오후 10시까지 자율학습실에서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법은 요령보다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교과서와 문제집 내용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전략을 선택한 것.
수학 공부를 할 때는 교과서와 익힘책에 나온 문제를 2회 이상 반복해 풀었다. 문제를 풀 때는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않고 ‘다음 풀이과정으로 넘어가는 이유가 뭐지?’라고 자문하며 내용을 곱씹었다. 노트에다 2, 3회 반복해 문제를 풀고, 시험 전에는 교과서 속 문제를 풀며 마무리했다. 틀린 문제는 해설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으며 외워버렸다.
영어는 교과서 본문을 통째로 외웠다. 해설지에 나온 해석을 본 뒤 교과서를 보지 않고 영어 문장으로 바꿔 적었다. 그 다음에는 외워질 때까지 입으로 따라 말했다.
국사만큼은 암기가 아닌 이해로 접근했다. 짬이 날 때마다 그림이 곁들어진 이야기 국사책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역사적 사건의 맥락이 이해됐다. 교과서는 시험 전에만 읽으며 마무리했다.
흘린 땀의 결과는 정직했다. 공부 시작 1년 만에 전교 148등에서 30등으로 100등 이상을 끌어올린 것이다. 특히 시험을 보면 찍기에 급급해 평균 53점(4등급)에 머물던 수학 점수가 평균 74점(2등급)으로 껑충 뛰었다.
이 양은 요즘도 오전 6시 반이면 일어나 학교에 간다.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새벽 1시가 되어 잠이 든다. 매일 반복되는 삶. 그는 불행할까? 아니다. 삶의 이유를 찾았기에 공부가 즐겁다. 지금도 꿈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에.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이 많잖아요. 하지만 경찰 강력반 같은 곳에서 현장을 누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언젠가는 현장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수사관이 될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학교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꿈을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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