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존을 향해]유산기부 운동 펼치는 오경 스님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29일 03시 00분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하는 레인메이커를 찾아서
“거액 유산, 때론 가족갈등의 씨앗…10분의 1이라도 사회에 남기세요”


서울 구로구 관음포교원에서 만난 오경 스님(51)은 1999년부터 4년간 서울 종로구 법련사에서 장례를 주관하며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고 했다. 부잣집 장례일수록 곡소리가 안 난다는 것이다.

“넉넉지 못한 집안은 자식들이 울기도 하며 장례를 치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좀 산다’는 집안의 장례식은 소리 없는 전쟁터로 변합디다. 부모가 유산 정리를 안 하고 떠나는 경우라면 특히 그래요.”

건전한 상속문화 연구 사업을 펼치고 있는 오경 스님은 “사회지도층은 가진 재산의 10분의 1만이라도 나누겠다는 결단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건전한 상속문화 연구 사업을 펼치고 있는 오경 스님은 “사회지도층은 가진 재산의 10분의 1만이라도 나누겠다는 결단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그는 인간의 욕망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한국의 장례식이라고 말했다. 신도들의 유산 상담을 하면서 하루 만에 가족들이 원수로 변하는 것도 여러 차례 지켜봤다. 한 보살이 남편이 남긴 유산 일부를 절에 기부하려 하자 자식들이 스님을 찾아와 “모친을 어떻게 꼬드긴 거냐”며 도둑놈 취급한 적도 있다. 그는 100억 원대 넘는 자산가들을 만날 때마다 ‘믿을 게 없어서 자식을 믿느냐’ ‘돈 앞에선 형제도 부모도 없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오경 스님은 이때 얻은 깨달음으로 2003년 아름다운재단에 ‘이별학교’를 차렸다. 절간살림을 아껴 모은 종잣돈 8000만 원은 현재 건전한 상속문화를 위한 연구 출판 사업비로 쓰이고 있다.

그는 유산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이유로 전통적인 상속제도의 본령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점을 꼽았다. 옛날에는 장자에게 상속하면 유산뿐 아니라 일가친척을 거둬야 하는 책임도 물려줬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만 누리려고 부모 돈을 탐낸다는 것이다.

“내가 했던 고생을 자식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되돌아봐야 합니다. 강남에 사는 한 부모는 자식이 결혼할 때 20억 원짜리 165m²(50평) 아파트를 사줬더니 264m²(80평)가 아니라며 자식이 투덜댔대요. 진짜로 자식을 위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겁니다.”

인터뷰 도중 그는 대뜸 기자의 연봉을 물었다. 얼마가 조금 넘는다고 말했더니 다시 물었다. “지금 당장 연봉의 몇 배가 훌쩍 넘는 돈이 유산으로 떨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직장인 월급으로 1억 원을 만들기 힘든 현실에서 단번에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유산은 누구도 거절하기 힘들다. 스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수록 이런 기회 앞에 이성을 잃는 세태를 씁쓸해했다.

오경 스님은 유산은 불로소득이라는 사회 병폐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계급이 상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속 받은 사람과 한 푼도 못 받은 사람의 출발선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사회지도층에 거창한 사회공헌 사업을 외치지 말고 재산의 10분의 1만이라도 기부하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불교의 최대 덕목은 보시(布施)라고 믿는 오경 스님은 자신의 법문을 듣던 한 교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셨는데 퇴직금 3억 원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셨대요. 마음은 있었는데 마땅한 기회와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 주저했는데 내 법문이 계기가 됐나 봐요.” 누군가 기회를 마련해주고 방법을 알려주면 유산 나눔은 그리 어려운 벽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런 사람이 매년 1%씩만 늘어나도 사회는 좀 더 유연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법전 연구만큼 유산 상속 운동에 힘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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