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무렵인 1988년 11월. 쌀쌀한 서울 청량리역 광장에 앉은 한 노숙인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한 그릇을 불쑥 내민 목사 한 명이 있었다. 한 그릇은 며칠 지나지 않아 열 그릇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목사는 솥에 밥을 지어 노숙인을 대접했다. 청량리역 광장에서 밥 짓는 목사는 “퍼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밥퍼’ 봉사의 첫날은 최일도 목사(54)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밥 나눔 운동은 그렇게 ‘밥퍼’라는 이름을 달고 꾸준히 이어져 23년 만인 올해 4월 500만 그릇을 넘겼다.
‘밥퍼’ 운동을 주관하는 다일공동체 측은 “하루 1200인분을 만들고 음식이 남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지난달쯤 500만 그릇을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다일공동체에서도 정확히 몇 그릇을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2000년 이후 각계에서 지원금이 들어오고 2002년 서울시에서 예산을 보조해줘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따뜻한 건물에서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장소인 ‘밥퍼나눔운동본부’를 세우면서 하루에 몇 그릇을 만드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단체 측은 “봉사하는 입장에서 그릇 수를 세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집계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주변의 도움도 늘었다. 연예인인 션(본명 노승환), 정혜영 부부가 결혼 1주년인 2005년 10월 8일부터 매년 결혼기념일에 365만 원을 두고 가는 것을 비롯해 수많은 신혼부부가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청량리 인근에서 청과물이나 수산물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수시로 밥퍼 식당을 찾아와 신선한 식재료를 기부한다. 식사를 하러 온 노숙인의 머리를 깎아주고 다듬어주는 미용사도 생겼다. 하루 최소 봉사인력을 30명으로 잡고 당번을 정해 음식을 만들고 있지만 식당에는 늘 40명 안팎의 인원이 밥과 반찬을 준비한다. 이옥주 다일공동체 홍보실장은 “지금까지 다녀간 봉사자만 20만 명 정도”라며 “지금은 국내뿐 아니라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등 해외 4개국에서도 봉사단을 꾸려 현지 노숙인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목사가 밥퍼 나눔 운동을 시작한 후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보편적인 형태의 봉사활동이 됐다. 노숙인이나 무의탁 노인이 많이 찾는 탑골공원 등에도 ‘밥차’ 봉사자들이 내준 식사에 허기를 달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됐다. 최 목사는 “자원봉사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23년 전보다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분이 크게 늘었다”며 “이런 활동이 종교나 계층을 넘어 거리에 배고픈 이들이 더는 없을 때까지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일공동체는 ‘오병이어(五餠二魚·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나눠 먹었다는 신약 성경 내용을 사자성어로 표현한 것)의 날’인 2일 500만 그릇을 넘긴 기념 예배와 조촐한 축하 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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