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오전 10시 반 경기 과천시 막계동 서울동물원 원장실. 최근 태어난 새끼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임원, 사육사 등 11명이 모였다. ‘동물작명(作名)위원회’의 올해 첫 번째 회의가 열린 날이다. 발표를 맡은 편현수 사육사가 지난해 12월 말 태어난 암사자 두 마리에 대해 “‘라이언’의 ‘라’에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길라임’과 ‘김주원’ 이름을 붙여 라임과 라원이 어떠냐”고 말했다. 곧바로 “드라마를 안 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론이 나왔다. 하지만 “젊은 관람객이 좋아할 것 같다”는 재반론도 나와 팽팽한 토론이 이어졌다. 격론 끝에 아기 사자 두 마리의 이름은 ‘라임’(사진) ‘라원’으로 결정됐다. ○ 작명 위해 위원회도 구성
동물작명위원회는 서울동물원 내 동물 이름 심의기구로 2005년부터 운영돼왔다. 모의원 서울동물원장은 “과거 대충 짓던 데서 벗어나 동물의 ‘동격(動格)’을 존중해주는 차원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만들어주려 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회의는 1년에 두 차례 열린다.
현장은 꽤 진지했다. 최근에 태어난 두발가락 나무늘보 이름 짓기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잠만보’(만화 ‘포켓몬스터’ 속 잠자는 캐릭터) ‘잠보’ ‘만보’ 등 의견이 갈리자 거수로 6표를 받은 만보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서울동물원은 앞으로 작명뿐 아니라 개명(改名)을 위해 수시로 위원회를 열 예정이다. 말레이곰 ‘꼬마’의 경우 현재는 일곱 살로 어리지만 다 큰 후에는 꼬마로 불리는 것이 맞지 않아 개명 대상 1호로 꼽힌다.
작명위원회가 없는 어린이대공원과 에버랜드 등 다른 동물원도 동물 이름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물 작명 유형은 △동물의 행동이나 움직임에서 비롯된 애칭(두 손 모아 기도하는 행동을 보이는 에버랜드 불곰 ‘소원이’), △동물의 서식지(서울동물원 수달 ‘서천’ ‘태백’ ‘추풍령’) △사회적 배경 및 시대, 트렌드 반영(1999년 태어난 에버랜드 사자 3형제 ‘이메일’ ‘테크노’ ‘아이디’)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 이름 하나로 운명이 바뀌기도
최근에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한 이름이 선호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태어난 호랑이 상당수가 ‘16강’ ‘승리’ ‘민국’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또 지난해 11월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사건 등 안보가 불안할 때는 ‘평온’ ‘평화’ 같은 희망적인 단어가 이름이 된다.
어린이대공원은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기증 받은 코끼리 암수 한 쌍의 이름을 짓기 위해 시민 대상 공모전을 벌여 ‘캄돌이’(수컷) ‘캄순이’(암컷)로 최종 결정했다. 어린이대공원 제공 이름이 해당 동물의 운명을 바꾼 사례도 있다. 서울동물원 독수리 ‘사랑이’는 2004년 강원도 야생에서 발견될 당시 윗부리가 휘어져 한동안 ‘삐뚤이’로 불렸다. 시름시름 앓아 동물병원 신세를 져야 해 다른 독수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이후 사육사들이 “제대로 보살펴주자”며 이름을 사랑이로 바꿨다. 이후 건강을 회복해 현재 동물원 내 독수리 서열 2위까지 올랐다.
모든 단어가 작명 소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대공원이 에버랜드로부터 받은 호랑이 이름을 건강하라는 뜻으로 ‘건이’ ‘강이’로 지으려 했다가 ‘건이’라는 이름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떠오르게 한다는 에버랜드 측 지적에 따라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 원장은 “동물 작명은 동물과 사육사 간에 교감이 더 잘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관람객에게 이름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고 친근감을 주려는 마케팅”이라고 말했다.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이름 공모전이 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이대공원에 사는 캄보디아 코끼리 ‘캄돌이’ ‘캄순이’는 지난해 공모한 시민 아이디어 1700건 중에서 최종 선정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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