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새로 생겨서, 손자가 생겨서… 정말 좋아요”… 외로움이 만나 ‘5월의 情’이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5일 03시 00분


■ 서울 개봉동 공부방-실버케어센터 만남

어버이날(5월 8일)을 닷새 앞둔 3일 서울 구로구 개봉동 ‘그루터기 배움터 지역아동센
터’에 다니는 아이들이 인근 미소들실버케어센터를 찾았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버이날(5월 8일)을 닷새 앞둔 3일 서울 구로구 개봉동 ‘그루터기 배움터 지역아동센 터’에 다니는 아이들이 인근 미소들실버케어센터를 찾았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나영이(9·여)가 수줍게 건넨 도시락을 열어 본 이정숙 할머니(69)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도시락 안에는 유부가 터져 밥풀이 삐져나온 어설픈 유부초밥 6개가 꽉 들어차 있었다. 지난해 9월 갑작스레 찾아온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하고 말하기 어려운 할머니는 나영이의 등을 힘겹게 수차례 쓰다듬었다.

3일 오후 늘 조용했던 서울 구로구 개봉동의 노인전문 의료복지시설 ‘미소들실버케어센터’가 때아닌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인근 지역공부방 ‘그루터기 배움터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초등학생 30명이 찾아왔기 때문. 공부방 어린이들과 센터 어르신은 올 초부터 일대일 결연을 하고 친가족처럼 지내왔다.

휠체어에 앉은 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어르신 30명은 근 한 달 만에 보는 손자 손녀 얼굴에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어르신들은 아이들이 깜짝 준비해 온 도시락과 카네이션 등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고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김기섭 할아버지(79)는 품에서 떠나지 않는 근호(11)의 엉덩이를 두들겨 주며 휴대전화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 할아버지는 심한 퇴행성관절염과 뇌중풍으로 2008년 6월부터 2년 반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다 큰 손자 놈들만 보다가 어린 손자 녀석이 새로 생겨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최근 갑작스레 찾아온 뇌중풍으로 투병 중인 김순경 할머니(86)는 결연 손녀 해진이(12)의 손을 꼭 잡은 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공부방과 센터의 인연은 올 초 설 연휴에 아이들이 병원을 찾아와 색동 한복을 입고 특별공연을 선보인 데서 시작됐다. 이 공부방 어린이는 30명 중 29명이 다문화가정이나 한부모가정, 조손(祖孫·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로 구성된)가정, 기초생활수급가정에서 살고 있다.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매일 방과 후 학원에 가는 대신 공부방을 찾아와 공부와 저녁식사를 해결한다. 정부 지원금과 개인 후원금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는 이명희 센터장의 평소 고민은 한 가지다. 혹시나 아이들이 받는 데에만 익숙해져 감사하고 베푸는 법을 잊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이 때문에 매년 12월이면 그동안 도움을 준 지역주민을 초청해 노래와 춤 등 장기자랑 공연을 선보이는 게 이 공부방의 전통이다.

이곳에 있는 노인 대부분은 뇌중풍과 치매 등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다. 한편으로 가족과 사회와 떨어져 있어 그만큼 외로움도 컸다. 처음 아이들을 만나던 날 평소 예민한 성격의 노인들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침대 모서리에 붙여놓기도 했다. 기특한 아이들은 외로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노인들이 겪고 있는 신체 변화와 질병을 이해하는 자원봉사교육도 받고 2월부터는 각자 일대일 결연을 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왔다.

다섯 번째 만남인 이날 방문이 더 특별한 이유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 학교를 마치자마자 공부방으로 뛰어 들어온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부를 ‘어머님 은혜’ 노래를 연습하고 카드에 그동안 쑥스러워 말로는 다 못한 말들을 적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채연이(13·여)도 ‘할머니 손녀딸 채연이에요. 5월 3일만을 기다렸어요. 매일매일 할머니 생각해요’라고 써내려갔고 평소 장난기가 넘치는 정환이(8)도 삐뚤빼뚤한 글씨로 ‘할머니 걱정돼요. 그러니까 건강하세요’라고 썼다. 유부초밥 재료는 평소 공부방을 후원해 온 CJ도너스캠프가 지원했다.

이날 어르신들도 어린이날을 맞아 손자 손녀들에게 시계와 액자 등을 선물했다. 서로 선물을 주고받은 어르신과 아이들은 도시락을 함께 나눠 먹으며 다음 달 만남을 기약했다. 서로가 있어 따뜻한 5월의 멋진 날이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