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들이 버리고 간 빈 술병이 널린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이 놀이터 내부에는 CCTV가 없어 아이들은 성폭력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놀이터 화장실에 갈 때는 늘 그 아저씨가 따라왔어요.”
3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의 한 놀이터. 이곳에서 놀던 남녀 초등학생들은 즐겁게 노는 중 가끔씩 주변을 돌아봤다. ‘하얀 모자 아저씨’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동네 아이들 중에 ‘하얀 모자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권모 양(11)은 “1주일에 몇 차례씩 한 아저씨가 하얀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며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화장실에 언제 갈 거냐’고 묻거나 여자아이들이 화장실 갈 때만을 기다렸다 쫓아왔다”고 말했다. 이 동네 아이들에 따르면 ‘하얀 모자’는 약 3년 전부터 나타났으며 여자아이들이 화장실에 가면 먼저 화장실로 뛰어가 안에서 기다렸다는 것. ‘하얀 모자’는 아이들이 들어오면 ‘바바리맨’으로 변해 바지를 벗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가 최근 차를 하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다는 등의 세세한 사실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자주 봤다고 했다.
‘하얀 모자’ 이야기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자신들이 놀이터에서 겪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김모 양(9)은 “미끄럼틀 위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올라와 치마 안에 손을 넣고 다리를 만지고 도망갔다”고 말했다. 이날도 만취한 노숙인이 여자아이들에게 다가가려다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의 제지로 돌아서는 일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최근 아동 성폭행이 위험수위에 달할 정도로 빈번하지만 아이들이 자주 노는 동네 놀이터와 공원 등은 여전히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 이 놀이터만 해도 ‘하얀 모자’는 물론이고 인근 노숙인들까지 빈번히 출몰하지만 놀이터에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폐쇄회로(CC)TV는 하나도 없다.
인근 지역의 또 다른 놀이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 동네에 사는 김모 군(9)은 “어떤 아저씨가 미끄럼틀 밑에 앉아 있다 다리를 갑자기 잡고는 안 놔줘서 겨우 도망갔다”며 “밤에 그네 타고 있었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술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도망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찾은 이날도 놀이터 옆에서는 이미 술에 만취한 노숙인 두 명이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싸우다 말고 한 여자아이를 보며 “예쁜아, 너 돈 있지? 가서 술 좀 사와라”고 한 뒤 아이가 도망가자 욕을 해댔다. 이곳에도 CCTV는 보이지 않았다.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에서 발생한 만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폭력 사건은 168건. 이 중 78건(46%)이 ‘노상을 포함한 놀이터·공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서울시내 놀이터·공원 1614곳 중 시설 내부에 설치된 CCTV는 783개에 불과했으며 특히 놀이터 429곳에 설치된 CCTV는 99개에 그쳤다.
CCTV 설치를 맡고 있는 구청 측은 “현실적으로 놀이터와 공원 내부에까지 카메라를 설치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동대문구청 관계자는 “지난해 540여 건의 CCTV 설치 관련 민원이 들어왔지만 예산 부족으로 20여 건만 설치했다”며 “위험한 상황인 건 알지만 쪼들리는 구 예산 때문에 행정안전부가 전폭 지원해 주지 않으면 CCTV를 늘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아동 성폭력 문제가 워낙 심각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현실 탓만 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지적이 많다. 비용은 들지만 CCTV가 범행 발각에 대한 두려움을 높이는 등 범죄 예방에 큰 역할을 하는 만큼 놀이터 내부까지 설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놀이터 내부에 CCTV를 의무 설치하도록 지자체 조례를 개정하거나 행안부와 지자체가 재원 마련안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며 “아동 성폭행 문제는 언제까지 예산 탓만 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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