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가로 변신한 무기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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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2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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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포기, 벌레 한 마리 생명도 소중한데 저는 그동안 사람을 죽이는 길을 걸어왔죠. 이젠 생명을 살리는 길을 가려합니다."

평생 무기 개발을 해오던 과학자가 지구와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국토 종단 걷기에 나섰다. 전 국방기술품질원 기술기획부장 김재훈 박사(53)는 정년을 10년 앞둔 지난해 말 사표를 냈다. 김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국방과학연구소와 국방기술품질원에서 27년간 근무하며 K-21 장갑차와 해군 전자전 장비 등 신무기를 개발했다.

"무기 만드는 데 젊음을 바쳤는데 어느 날 내가 살상도구를 만들고 있다는 회의가 들더군요. 남은 인생은 죽어가는 지구와 생명을 살리는 데 쓰려고 합니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박차고 나온 그는 이후 환경운동가로 변신했고 7일 전남 고흥에서 35일 일정의 국토종단을 시작했다. 이 국토종단에는 환경단체 회원과 일반인 등 70여 명이 동참했다. 올해 초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의 철학과 함께 '지구 살리기 국토종단' 계획을 올리자 이를 본 누리꾼들이 동참해온 것이다.

김 박사 일행은 시골길을 걸으며 지구가 무참히 파괴되는 현장을 무수히 마주쳤다. 분리수거가 안 된 채 뒤죽박죽된 쓰레기 더미, 논두렁에 수북이 쌓인 비료 봉지, 가축 분뇨가 떠다니는 개울 등 농촌의 환경오염은 도시 못지않았다. 골프장 개발을 위해 산이 통째로 파헤쳐진 곳도 많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은 무덤으로 뒤덮여있었다. 김 박사는 "환경오염은 도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골은 환경의 사각지대"라고 말했다.

그는 전국을 걸으며 즉석 강의를 통해 "지구도 우리와 똑같은 의식과 감정을 가진 생명체"라는 점을 시민에게 알리고 있다. 일요일이었던 15일에는 경남 산청의 지리산 고교를 지나다 축구를 하고 있는 고교생에게 게릴라 강의를 열었다.

그는 "최근 100년 간 지구 온도가 1.5도 올랐는데 사람으로 치면 체온이 4도나 오른 거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지구가 지독한 독감에 걸렸네요'라며 관심을 보였다"며 "이런 학생들이 늘어나면 생명과 자연을 사랑하고 현재의 인간 위주로 개발되는 지구를 돌아볼 터전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 일행은 종단 기간동안 비닐봉투나 나무젓가락 등 1회용품을 쓰지 않는 '친환경 여행'을 하고 있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지역 동네 분들이 종종 일회용 믹스커피나 초코파이를 건네지만 비닐 포장된 물건은 쓰지 말자고 약속을 한 상태여서 정중히 사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박사 일행은 다음달 11일경 목적지인 서울시청 앞 광장에 도착할 예정이다. 김 박사는 "인간은 살기위해 자연을 해치지만 자연이 무너지면 인간도 살 수 없다"며 "새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이름모를 야생화, 논둑에서 재잘거리는 개구리 소리 등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끼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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