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검색 결과 저축은행 사외이사에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들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 수사에서 금감원 출신 감사들이 불법 대출에 적극 가담한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사외이사 역시 ‘또 다른 로비 창구’로 이용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 말 한마디로 ‘월급 값’-로비 통로
2001년 수백억 원을 횡령하고 주가를 조작한 뒤 수사를 무마하기 위해 정관계 등에 로비를 한 ‘이용호 게이트’가 불거졌을 당시 G&G그룹(이 씨가 만든 구조조정 전문회사 그룹) 계열사인 인터피온(옛 대우금속) 사외이사였던 도승희 씨(69)가 사건무마 청탁을 명목으로 돈을 받아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처럼 사외이사가 ‘전문 브로커’처럼 직접 금품을 건네는 경우가 많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거물급’ 사외이사는 그 존재만으로 ‘로비스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금융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들이 가진 정·재계 인맥은 지방을 연고로 활동하는 저축은행이 정치권이나 금융계 고위인사에게 줄을 대는 데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사외이사의 주선으로 이뤄지는 유력 인사와 저축은행 임원 간 주말 골프 회동이나 술자리 만남이 대표적인 사례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처음부터 회사 측에서 직접 연락하면 부담스럽지만 평소 친분 있는 사외이사를 통하면 자연스럽게 안면을 틀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출 관련 업무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사외이사의 ‘덕’을 보는 일이 적지 않다. 저축은행 임직원들이 인지도가 높은 사외이사 이름을 거론하며 대출영업 경쟁에 나서기도 하고 간혹 사외이사가 직접 시행업체나 건물주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한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지방에선 학연, 지연이 아직도 크게 작용해 해당 지역 출신 사외이사의 말 한마디에 수억 원의 대출이 왔다 갔다 한다”고 귀띔했다.
○ 외부 감시 역할은 제대로 못해
저축은행 사외이사는 대주주 및 경영진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대주주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 뽑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당 지역 출신 유력 인사가 고위직에서 퇴직했을 경우 예우 차원에서 사외이사 자리를 마련해주는 관행도 존재한다. 부산저축은행그룹은 부산을 연고로 영업을 하고 있지만 박상구 명예회장 이후 박연호 회장과 김양 부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대부분 호남 출신이다. 사외이사 역시 김태규 전 광주교대 학장(전 국회의원)과 박성수 전남대 교수 등 호남 인사들로 채워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 경영을 외부 인사가 투명하게 감시한다는 사외이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외이사 중 상당수가 이사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을뿐더러 나오더라도 회의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산저축은행 경영공시 자료를 살펴보면 강성범 사외이사(금감원 출신)는 작년 9월 선임된 이후 올해 1월 말까지 15차례나 열린 이사회에 단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 변질된 사외이사제도
금융위원회는 상호저축은행법 개정을 통해 정부 및 감독당국 출신 또는 대주주와 학연·지연 등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이 저축은행 사외이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저축은행 업계에서는 유명무실해진 사외이사제도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은행 실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외이사를 ‘용돈벌이’ 정도로 여기는 정치인이나 교수보다는 차라리 금감원 출신 등 실무를 아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낫다는 것.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사외이사는 업무상 도움도 안 되고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 형식적으로 모시는 것”이라며 “어차피 돈을 줄 바에야 거물급 인사를 데려와 위기상황에 써 먹으려고 하는 게 저축은행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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