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고엽제로 추정되는 물질을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주한미군기지 캠프 캐럴 안팎에 묻었다는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측에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위반의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시 SOFA에는 환경 폐기물 관련 규정이 없어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해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허술했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24일 “화학물질이 매몰 처리된 1978∼1980년에는 고엽제를 비롯한 폐기물 관련 규정이 SOFA에 명시되지 않아 미군의 이런 행위가 당시 SOFA를 어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소급 적용도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당시 SOFA에는 ‘주한미군이 시설 구역을 운영할 때 공공안전을 적절히 고려한다’는 추상적 규정밖에 없었다.
SOFA에 환경 관련 규정이 생긴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2000년대 이후다. 외교통상부와 국방부에 따르면 2001년에야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 각서는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에 의해 야기되는 인간 건강에 대한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오염의 치유를 신속하게 수행한다’고 규정했다. 2009년에 SOFA 부속서로 ‘공동환경평가 절차서’가 마련됐다. 이에 따라 미군기지에서 오염사고가 발생할 경우 최단 시간에 연락을 취하고 48시간 내에 서명 통보한 뒤 절차를 거쳐 공동조사와 오염치유 계획을 협의한다.
일각에서는 고엽제 매립은 현재까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기 때문에 SOFA를 소급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미군이 당시 SOFA를 명시적으로 위반했다는 근거가 없어 소급 적용은 법리적으로 어렵다고 본다. 현재의 SOFA 규정에 대해서도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과 교수는 “상황 개선에 대한 협력은 가능하지만 원상회복 의무나 손해배상 문제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국제법 위반으로 볼 수는 있다. 1972년 유엔 인간환경회의에서 채택된 ‘스톡홀름 선언’의 원칙 21호는 ‘한 국가의 주권행사가 다른 나라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과 교수는 “당시 유엔은 이 선언이 국제관습법으로 인정되는 효력을 가진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미군의 화학물질 매립을 국제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주한미군에 따르면 2004년 캠프 캐럴 내 시추공 13개를 통해 오염 여부를 조사한 결과 1개 시추공에서 다이옥신 1.7ppb가 검출됐다. 이는 같은 해 환경부가 조사한 전국 각지의 토양 다이옥신 농도 0∼0.119ppb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대기 중의 다이옥신 양에 대한 기준치가 있지만 토양 내의 다이옥신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치가 없다. 미국도 토양 다이옥신에 대한 명확한 기준치가 없다. 이번 조사단에 참여한 옥곤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는 “캠프 캐럴 일대에서 검출된 다이옥신이 고엽제에 의한 것인지, 주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 명확한 조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미군 측에 책임을 묻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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