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前 고대총장 별세]내가 뵈어 온 김준엽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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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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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애족-후학양성 ‘외길’… 이시대 지성의 표본이셨다

김준엽 선생님은 소신을 다해 자신의 분야에 매진하고 오직 학문 연구와 대학 교육 진흥을 위해 정열을 쏟아 부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자 표본이셨다.

고려대에 입학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50여 년 동안 뵈어온 선생님의 생활에는 치열한 항일운동 정신, 민주주의의 실천, 그리고 학문의 국제화라는 철학이 관통하고 있었다. 항일운동을 한 학계의 거목답게 소소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타인을 폄하 비판하는 일에는 항상 거리를 두시며 진정 고매한 인품이 어떤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셨다.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항일 운동을 하시던 격동의 역사를 제자나 지인에게는 종종 말씀하셨지만, 그런 중에도 당신을 높이거나 하는 모습은 결코 뵌 적이 없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뒤에는 국무총리직을 두 번이나 제의받았지만 번번이 고사한 것도 학자로서의 본임에 충실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엄격한 자기 관리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선생님께서 뜻하신 바가 정계가 아닌 학문 활동에 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에 있었던 수많은 제의는 물론이고 총리직까지 거절하시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셨던 것이다. “총리직을 사양하는 학자도 한 사람쯤은 있어야지 모두 수락하는 사람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필자에게 말씀하시던 대목은 너무도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선생님의 인생관과 국가관을 이해하려고 할 때 1950, 60년대 지식인 사회에 영향력을 끼친 ‘사상계’의 편집 방향과 지침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사상계’의 5대 편집 방침은 민족통일의 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이었다. 이러한 편집 방침은 광복 후 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피땀 흘려 나아가는 정신적 지표가 되었고, 그 결과 눈부신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새삼 실감케 한다.

광복군 활동을 통해 익힌 애국애족의 절개는 고려대 총장 시절 군부통치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보호하도록 하였고 결국 정부와의 충돌로 비화되어 총장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 구현을 줄기차게 외친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대는 군부독재와의 갈등 속에서 비밀리에 해직교수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곤 하여 타 대학 해직교수들의 부러움을 받곤 했다. 당시 교무처장이었던 필자는 선생님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린 결단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러한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내린 이런 대담한 결정은 선생님의 항일 운동에서 나온 정신적 산물임을 뒤늦게 깨달은 바 있다.

일찍이 해외에서 공부하신 선생님은 대학의 충분한 연구비 지원이 있어야 최상의 창의적인 연구 결과물이 나온다고 믿으셨다. 그래서 총장을 하시면서 연구비 확충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고, 그 결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초기 연구비는 포드재단에서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이 같은 지원은 이후 한국학의 국제화를 추진하는 단초가 되었다. 필자가 1960년대 말 해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학문을 넓게 보고 이해하는 자세를 배운 것도 선생님의 은덕이다.

선생님께서는 생활도 검소하고 소박하기 그지없으셨다. 젊어서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서울 명륜동 집 한곳에서 계속 생활하셨고, 평생 역경의 삶을 자랑스러워 하시며 이를 ‘장정(長征)’에 비유하셨다. 선생님의 장정에는 돼지우리 같은 덤불 속에서 자고, 밀전병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던 고난의 시간이 많았지만 “내가 이제 이 고생을 하고 나면 이보다 더 하겠는가” 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정배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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