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풀려날 거다’라고 안심시키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한데 61년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빌딩 관리실에서 만난 김재조 씨(70)는 납북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인터뷰 내내 울먹였다.
그의 부친인 김기정 씨(1896년생·전 충남 예산군수)는 1950년 9월 초 서울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북한 인민군에게 강제로 납북됐다. 그의 부친은 1919년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하며 2·8독립선언 등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했으며 광복을 맞아 귀국해 광복 직후 충남 부여, 예산 등에서 군수를 지냈다. 정치의 꿈을 안고 1948년 상경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집이 잘사는 데다 관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 납북됐다.
아들 김 씨는 “당시 9세였는데 아버지가 집 근처 산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새벽녘에 잠시 돌아왔다”며 “아버지와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인민군 2명이 총을 들고 들이닥쳤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아버지가 끌려가실 때 목이 터져라 ‘아버지’를 부르며 쫓아갔지만 총을 든 인민군의 위협이 심해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며 “그때가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3남 2녀 중 넷째인 그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의 각별했던 아들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다녔던 광산회사와 김 씨의 학교가 서울 을지로에 있어 매일 아침 손을 잡고 함께 갔던 것. 김 씨는 “전쟁 직전 아버지가 등굣길에서 자전거를 사주기로 약속했었다”며 “전쟁 후 부자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의 약속이 생각나곤 했다”고 말했다.
얼마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리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직후 남북 적십자사와 정부 등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남북 관계가 호전된 뒤에도 김 씨의 실망은 더 커졌다.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지만 북한이 아버지의 납북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것을 봤는데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북한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김 씨는 결국 10여 년 전 더는 아버지가 살아있기 힘들다고 생각해 충남 보령에 가족 봉안묘(납골묘)를 만들고 위패를 모셨다. 그는 “내가 죽으면 아버지의 위패 옆에 내 유골을 안치해 다음 세상에서라도 아버지와 살고 싶다”고 그리움을 토로했다.
김 씨는 “6·25전쟁이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며 “그나마 60주년 때는 반짝 관심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사람들은 우리를 잊었지만 생이별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고 말했다. 이는 김 씨뿐만이 아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와 정부에 따르면 납북 피해 규모는 10만 명이 넘는다. 지난해 3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명단을 파악만 할 뿐 자국민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김 씨는 “정부는 납북자들을 정치적 문제 때문에 데려올 수 없다면 생사라도 확인해서 61년 된 우리의 한(恨)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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