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양지마을 일가족 휩쓴 산사태… 1m 옆에 파묻힌 아이 두고 엄마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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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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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쉴수가 없어, 눈에 코에 밀려드는 진흙
눈 감으면 안돼 잠들면 안돼, 우리 아이가…
어디있니…어디있니…소리라도 질러줘…

눈을 뜨자 눈 안으로 흙탕물이 밀려들어왔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니 이번엔 진흙이 빨려 들어왔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안은 흙으로 가득 차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뭇가지 위에 누운 듯 등은 따끔거렸고 다리는 묵직한 뭔가에 깔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영애(가명·31·여) 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마치 무덤 속 같았다”고 말했다.

○ 그날


9일 낮 12시 경남 밀양시 상동면 양지마을. 조 씨는 이곳 시댁에서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치고 있었다. 이날은 조 씨 시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온 가족이 모인 날. 시어머니는 마루에서 마늘을 다듬고 있었다. 마루 옆 안방에는 큰조카 진욱(가명·15)이가 조 씨의 딸 은영(가명·3)이를 업고 TV를 보고 있었다.

제법 말을 하기 시작한 은영이는 “오빠, 오빠” 하며 까르르 웃어댔다. 현관 난간에 쪼그리고 앉은 작은조카 영욱(가명·12)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점심을 앞둔 시골집의 평화로운 풍경. 전과 산적의 진한 냄새가 온 집안을 휘감고 있었다.

다만 그날따라 유달리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안방에 있던 은영이가 조 씨에게 무언가를 말했지만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스르륵…” 나무 마루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이미 그곳엔 부엌이 없었다. 그 대신 거대한 흙더미가 벽을 부수며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게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 임도(林道)-재난의 시작


조 씨의 시댁은 해발 560m의 신곡산 자락에 있다. 앞으로는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개천이 흐르고 시댁 주변에는 외지인들이 지어 놓은 전원주택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민 이갑순 씨(64·여)는 “60여 년을 살고 있지만 이런 동네가 없다”며 “평생 홍수네 뭐네 그런 사고 한 번 없이 평온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그런 곳에 밀양시가 2007년 이 마을 뒷산인 신곡산 자락에 380m의 임도를 깔았다. 시는 당시 “산불이 나면 소방차가 그곳까지 올라가 불을 끌 수 있고 목재도 차에 실어 편하게 나를 수 있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주민 김병로 씨(73)는 “없던 길을 내주겠다고 하니까 그땐 다들 좋은 일인 줄 알았다”며 “그때 그 공사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말했다. 사고 당일 이 마을에는 시간당 40mm의 폭우가 쏟아졌다. 길을 내느라 깎은 산자락에선 시뻘건 토사가 군데군데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 “살려주세요”


영욱 군은 마당이 파일 듯 내리는 빗줄기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등 뒤에서 ‘쩍’ 하는 굉음이 들렸다. 집이 두 동강 나는 소리였다. 그 사이로 흙탕물과 함께 산더미 같은 흙이 쏟아져 들어왔다.

뒤돌아 도망가려는 순간 흙더미에 휩싸인 영욱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작은 소년의 몸은 흙과 물에 휩쓸려 개천 쪽으로 100m가량 떠내려갔다. 그는 “살려 주세요”라고 사력을 다해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개천으로 휩쓸려가던 영욱은 빠지기 직전 다리가 바위에 끼여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다른 가족은 대부분 참변을 피할 수 없었다. 조 씨의 시어머니는 집이 있던 자리에서 200여 m 떨어진 마을 정자 주변까지 휩쓸려가다가 나무 기둥에 깔려 숨을 거뒀다. 안방에서 세 살배기 사촌 여동생을 업고 있던 진욱도 인근 개천에서 혼자 숨진 채 발견됐다.

○ 엄마의 사투

조 씨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그는 흙더미에 매몰된 채 집에서 150m가량 떨어진 길목까지 떠내려가다 멈췄다. 그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기에 몸서리치던 조 씨는 의식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대로 잠들겠구나. 이대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겹게 눈을 뜨자 차가운 진흙이 눈으로 스며들었다. 송곳으로 눈을 찌르는 듯했다. 참다못해 눈을 감으면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눈을 뜬 채 또다시 진흙과 맞섰다.

“그렇게 죽을 순 없었어요. 우리 딸 살려야 하잖아요. 애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어요. 나는 이대로 죽어도 되는데 우리 딸은….”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던 그가 딸을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잠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며 흙더미는 점차 무게를 더해갔다. 빗물을 머금은 흙더미는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가슴을 짓눌렀다. ‘이젠 정말 죽는구나.’

그 순간 두 다리를 덮고 있던 진흙 더미가 물살에 휩쓸려갔다. 흙 밖으로 노출된 두 다리를 조 씨는 사력을 다해 흔들었다. 그녀가 보내는 마지막 SOS. 어디선가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들렸다. 구조대원들이 1m 가까이 쌓인 진흙과 자갈을 걷어내자 새카맣게 흙으로 뒤덮인 조 씨의 얼굴이 드러났다. 산사태가 난 지 2시간 40여 분 만이었다. 현장에 있던 한 소방관은 “빗물로 얼굴을 씻겼는데 눈가에 피가 흥건했다”며 “환자를 응급차로 옮기려고 하는데 대원들을 뿌리치더니 어디선가 깨진 안경을 주워다 쓰고는 ‘우리 아이, 우리 아이’ 하며 기어 다녔다”고 말했다.

조 씨는 응급차로 옮겨지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10여분 뒤 딸 은영이는 엄마가 구조된 곳으로부터 불과 1m 떨어진 곳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안타까운 모정


사고 사흘째인 12일 양지마을 마을회관 앞에는 조 씨가 딸을 태우고 왔던 승용차가 찌그러진 채 뒤집혀 있었다. 사고 당일 공장 근무를 나가 참사를 피했던 조 씨의 남편 박모 씨(38)는 숨진 가족들을 화장해 납골당에 안치하고 오는 길이었다. 뒷산에 있던 산소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해 어머니와 같은 곳에 모셨다. 10여 년간 홀로 살아오신 어머니가 이제는 그토록 그리던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 씨는 동네 곳곳을 돌며 가족들의 유품을 찾아다녔다. 집은 형체가 사라지고 냉장고와 장롱 등 세간은 온 동네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노트 한 권을 집어 들더니 유심히 내용을 살폈다. 쭈글쭈글해진 종이에는 어머니가 연필로 한 자씩 눌러쓴 글씨가 흙탕물에 번져 있었다. 박 씨는 “어머니가 손녀인 은영이가 유치원에 가면 직접 한글을 가르쳐주고 싶다면서 얼마 전부터 한글을 배우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터 아래엔 휠체어를 탄 한 여인이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 씨였다. 눈의 흰자는 아직 핏빛이었고 손톱은 모두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산사태로 속살을 훤히 드러낸 산자락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암흑 같은 흙더미 안에서 엄마를 애타게 찾았을 텐데…. 그렇게 가까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제가 더 죽을힘을 냈을 텐데….”

밀양=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유하늘 대학생 인턴기자 연세대 신방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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