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유럽의 주요 명품 브랜드가 줄줄이 가격 인상에 나선 가운데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14일 인하 방침을 발표하자 명품업계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명품업계는 고급화 전략의 일환으로 거의 매년 가격을 인상해 왔다. 에르메스도 지난해 1월까지 인상요인이 있을 때마다 가격을 올려왔다.
에르메스는 15일자로 평균 5.6%, 최고 10%의 가격 인하 방침을 발표하면서 “에르메스 제품은 대부분 EU 국가에서 생산되는 만큼 한-EU FTA 발표에 따른 가장 큰 수혜자”라며 “고객들에게 그 혜택을 돌려주기 위해 가격 인하 방침을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할인 혜택이 적용된 첫날인 15일과 다음 날인 16일 신세계백화점 에르메스 매장의 매출은 지난 달 중순 금·토요일 대비 52.6%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다른 명품업체들은 에르메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회사’로 비치면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가격과 관련된 이슈가 연일 도마에 오르면서 명품이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 위기감의 ‘본질’이라고 명품업계 관계자들은 귀띔했다.
‘럭셔리브랜드경영’의 저자인 미셸 슈발리에 박사는 저서를 통해 “명품 고객들은 제품을 구입할 때 이성적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이성적 기준이 도입되면 쇼핑의 기쁨이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격 등 이성적 요소가 세간에 오르내리면 ‘심리적 우월감 등 ‘꿈의 가치’를 고려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명품 핵심 고객들이 ‘꿈’을 잃고 실망할 것’이라는 게 명품업계의 우려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의 브랜드가 가격과 관련해서는 ‘노코멘트’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명품의 가격 정책에는 일반 소비재 브랜드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전략적 판단이 따른다”고 말했다. 에르메스의 이례적인 가격 인하 결정에는 이미 최고가 브랜드로 각인돼 있기 때문에 가격을 내리더라도 브랜드 가치에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작용했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에르메스는 주요 가방 라인인 ‘버킨35’ 모델의 평균가격이 1280만 원대에 달하는 최고급 브랜드로 꼽힌다. 다른 주요 브랜드의 대표적인 가방 모델보다 500만∼800만 원 비싼 것.
반면 샤넬 루이뷔통 등 다른 명품업체들은 고급화된 제품으로 VIP 소비자를 끌어들이려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어 에르메스처럼 가격 인하를 단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샤넬’의 경우 5월 가격 인상에 나선다고 발표하자 올 4월 롯데백화점 전국 29개 점의 부티크 매출 신장률이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67.5% 늘어났다. 따라서 FTA가 맞물리면서 오로지 이 이슈 때문에 가격을 올리는 것으로 뭇매를 맞은 측면이 있다는 게 일부 명품업계 관계자들의 ‘항변’이다. 한 명품산업 전문가는 “명품업체의 가격 결정은 여론이나 당장의 매출 증감이 아닌 브랜드 전략에 따라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