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인 공업계 고등학교 출신 김기철(가명·22) 씨는 지난해 한 공기업 채용에 응시했다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좀처럼 지울 수 없다. ‘학력 제한이 없다’는 채용공고만 믿고 1년 넘게 준비해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당당히 통과했지만 면접관들은 출신 학교에 대해서만 물었다.
김 씨는 “자격증이 3개나 있고 중견기업 인턴 경험도 있는데 모두 내가 나온 학교만 궁금해했다”면서 “한 면접관은 대놓고 공고 출신은 불량학생이 많다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2년간 공기업 시험 준비만 해 현장으로 돌아가기에는 감이 많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그는 아예 공무원시험 준비로 방향을 틀었다. 적어도 응시할 때 공기업처럼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기업은행과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에 이어 일부 시중은행 중심으로 전문계고 출신 채용 움직임이 확산되고 정부도 전문계고 육성 및 채용 지원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가 경영 전반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은 전문계고 출신을 외면하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이다. 지난해 정부는 공공기관 인사운영지침을 고쳐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과 함께 전문계고 출신도 채용우대자로 포함시키겠다고 발표했지만 지침 개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경제부가 21일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받는 공기업과 임직원이 500명 이상인 준정부기관 55곳의 최근 1년간 신규 인력 채용 실적을 점검한 결과 한국가스공사 한국광물자원공사 한국철도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한국거래소 등 다섯 곳만 총 26명의 전문계고 출신 사원을 뽑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55개 공공기관이 지난해 채용한 총 2375명 중 고작 1.1%에 그치는 미미한 수준이다.
공공기관은 재정부의 공공기관 인사운영지침에 따라 학력차별을 전면 금지하고 있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별도의 학력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문계고 출신에 대한 공공기관의 벽은 높다. 55곳 중 전문계고 출신을 우대하거나 따로 뽑는 곳은 가스공사와 광물자원공사 두 곳에 그쳤다. 나머지 세 곳은 계약직 경리사원을 뽑았거나 우연히 한두 명 채용한 것에 불과했다.
한 공공기관의 인사팀 관계자는 “전문계고 출신이 신입채용에 응시한 사례가 드물고 응시한다 해도 석·박사 출신 지원자가 넘치는 마당에 이들이 합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세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공공기관의 전문계고 출신 특채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전문계고 졸업자 의무고용제를 실시하면 공공 부문에서 전문계고 졸업생의 능력을 인식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재학생들의 취업 노력을 배가할 인센티브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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