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정말 많은 돈이 필요하다. 소득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가계수입의 절반이 아이에게 들어간다. 돈이 아이를 키우는 시대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의 사교육비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학교에 다니지도 않는 어린아이에게 쓰는 돈이 그렇다는 얘기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취학 전 아동의 육아 비용이 가정경제를 흔들고 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가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부모 10명 중 6명(59.4%)이 취학 전 아동의 양육비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
○ 돈 없으면 아이 못 키우는 사회
한모 씨(36·여·서울 양천구)는 1년 전 그만뒀던 회사에 파트타임 사원으로 최근 재입사했다. 빠듯한 살림살이 때문이었다. 한 씨의 남편은 대학교수로, 월수입이 약 700만 원이다. 이 정도면 수입이 적은 것도 아니고, 한 씨가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가계부는 왜 늘 적자일까. 원인은 육아에 있었다. 다섯 살 된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만 매달 400만∼500만 원이란다.
지출 내용을 보자. 영어유치원 비용이 매달 130만 원. 교재와 현장학습 비용 10만 원은 별도다. 여기에 일주일에 2회 하는 영어 애프터스쿨(방과 후 과외) 비용 16만 원이 추가된다. 계절마다 바뀌는 원복 값을 빼고도 150만 원이 넘는다. 영어유치원이다 보니 한글과 수학은 따로 시킨다. 매주 1회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가르쳐 주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 3만8000원이 든다.
창의력을 키워주는 ‘가베수업’을 듣기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간다. 3개월에 18만 원. 휴일에는 영어유치원 수업 보충을 위해 동물원에 가거나 뮤지컬을 본다. 10만 원은 금세 깨진다. 중국동포 도우미에게도 140만 원을 준다. 책이며 옷가지, 장난감을 사는 데도 근 100만 원은 들어간다. 한 씨가 ‘극성 엄마’일까.
“비싼 영어유치원을 보낼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아이 학교 가면 영어 공부 안 시킨 것 후회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안 보냅니까? 돈을 빌려서라도 가능하면 많은 기회를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데….”
둘째를 가질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한 씨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나 키우는 데도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데, 언감생심입니다.”
○ 명품 육아의 유혹에 무릎 꿇은 엄마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2명. 1980년 2.83명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자녀수가 줄었기에 육아 비용도 줄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오히려 ‘명품 육아’를 선호하는 엄마들이 늘면서 육아 비용은 늘고 있다.
강모 씨(32·여·서울 용산구)는 네 살 난 딸에게 버버리나 봉프앙 같은 명품만 입힌다. 자신의 옷을 못 사는 한이 있더라도 딸아이만큼은 명품으로 치장한다. 물론 이유가 있다.
“아이가 금방 자라면 버릴 옷이란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옷차림에 따라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게 현실이죠. 귀한 자식으로 보여야 푸대접을 받지 않습니다.”
이모 씨(33·여·서울 강남구)도 비슷한 이유로 명품을 선호한다. 아는 유치원 선생이 아이가 무슨 브랜드 옷을 입는지 가끔 옷깃을 뒤집어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오기’가 생기기도 한다.
“능력이 되는 한, 명품 옷을 입힐 겁니다. 아이가 열등감을 갖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 아이에게만큼은 최고를 해 주려는 엄마들의 욕구와 기업 마케팅 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육아용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지난해 소비자시민모임이 24개국의 육아 생필품 52개 가격을 조사했더니 수입 분유 시밀락(800g)은 3만5500원, 스토케 유모차는 199만 원이었다. 24개국 중 가장 비싼 가격이다. 스토케 유모차는 2위인 중국보다 40만 원이 비쌌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육아용품이 가장 비싼 나라다.
○ 자녀 1명 키우는 데 2억6204만 원
‘저렴한 육아’를 선택하는 엄마들도 돈이 많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노모 씨(33·여·서울 종로구)는 2007년 동대문상가에서 첫아이 출산용품을 마련했다. 배냇저고리는 5000원, 내복은 7000원 정도에 샀다. 올 7월 둘째를 낳기 전 다시 찾은 동대문시장에서 유아용품 매장들은 사라졌다. 명품 육아와 저출산 때문에 대부분 문을 닫은 것이다. 노 씨는 같은 제품을 2, 3배 더 주고 대형마트에서 사야 했다.
“첫아이를 키우다 보니 예방접종이며 장난감, 책처럼 돈이 들어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우린 둘째를 낳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둘째를 낳으라고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녀 한 명을 낳아 대학 졸업할 때까지 드는 총 양육비는 2억6204만 원(2009년 기준)이다. 김승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의 ‘전국 출산력 및 가족 보건복지 실태조사’에 나타난 연구 결과다. 자녀가 2명이라면 이 비용은 5억2408만 원으로 늘고, 3명일 때는 7억8613만 원으로 껑충 뛴다. 더욱이 한국 부모의 89.9%는 “아이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위원은 “보육비와 교육비가 많이 드는 건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는 사회가 나눠져야 할 짐을 개인이 모두 부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비용 육아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는 풀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양육 품질을 균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내 자녀만을 위한 명품 육아, 둘째 아이 낳기가 버거운 육아가 사라지려면 소득 수준에 관계없는 공공 육아 서비스를 정부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행복한 사회 자문단인 조복희 육아정책연구소장은 “출산과 육아에 대한 기회비용이 높다 보니 아이를 안 낳거나 하나만 낳는,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며 “비용은 덜 들고 품질은 높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더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의 부담을 사회가 떠안을 때 비로소 저출산 문제가 해결된다는 얘기다. ▼ 육아도 맞들면 낫다… 엄마들 뭉치니 진정한 ‘명품’ ▼
엄마의 등골을 휘게 하는 명품 육아의 대안을 공동육아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건강가정지원센터의 ‘공동육아나눔터’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기존 육아와 어떤 점이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6일 현장을 찾았다.
3층에 있는 나눔터에서는 7명의 아이가 재잘거리며 놀고 있었다. 공을 던지고 받다가, 이내 함께 모여 장구와 북을 두들겼다. 5명의 엄마가 아이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뛰놀던 아이들은 엄마와 이모(친구의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 동화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와 아이들은 모두 올 3월 만들어진 ‘귀여운 악동들’ 가족품앗이에 속해 있다. 가족품앗이는 같은 지역에 사는 엄마들이 함께 아이를 키우는 모임이다. 기초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동육아나눔터에서 활동한다. 여성가족부는 서울 강남구와 관악구, 경기 고양시 등 전국 23곳에서 가족품앗이를 활용해 공동육아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가족품앗이의 가장 큰 장점은 양육비 절감에 있다. 우선 어린이집 비용이 들지 않는다. 시설 이용은 모두 공짜다. 그러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어린이집의 활동과 다른 점은 없다. 오히려 엄마들이 옆에서 지켜봐주니까 교육 효과가 높다. 가족품앗이에 소속돼 있는 가정끼리는 서로 학습교재를 빌려주거나 옷을 물려주기 때문에 다른 양육비까지 줄어든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가족품앗이에 참여한 장효정 씨(33·여)는 “처음에는 장난감을 독차지하려고 싸우던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노는 게 재미있다는 사실을 금세 배운다. 말도 빨리 느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동육아나눔터는 엄마들에게도 유용한 공간이다. 엄마들은 함께 수다를 떨며 아이 키우는 고충을 털어놓는다. 양육 정보도 교환한다. 은행에 가거나 다른 모임에 참석해 자리를 비워도 다른 엄마들이 자기 아이처럼 봐준다. 이날도 엄마 한 명이 성당 모임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를 찾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렸고, 다른 엄마들 품에도 스스럼없이 안겼다. 엄마들의 특기를 살려 미술 수업, 수학 수업 등 다양한 특별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귀여운 악동들의 대표 격인 최정순 씨(40)는 “값비싼 옷을 입고 영어유치원에 가는 것보다 엄마랑 친구랑 함께 신나게 노는 것이 아이들이 잘 크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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